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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인

생애

선생의 본관은 의성(義城), 이름은 창숙(昌淑), 심산(心山)은 그의 호(號)이다. 훗날 왜경에 잡혀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으로 하체가 부자유스러워지자 남들이 벽옹(앉은뱅이 노인)이라 불렀는데 선생도 따라서 스스로를 벽옹이라 하였다.

선생은 조선조 선조 때의 학자이며 명신(名臣)인 문정공(文貞公) 동강(東岡) 김우옹 선생의 13대 증손으로 부(父)호림(護林), 모(母)인동(仁同) 장(張) 씨의 1남4녀중 1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일제 침략으로부터의 독립과 통일민족 국가의 건설이라는 민족적 대의를 위해 오로지 일생을 바치었으니, 철들면서부터 시작된 애국 계몽운동, 국내외에서의 혁명적 항일 투쟁, 해방 후의 반독재 민주투쟁, 분단 체제하의 통일정부 수립운동 등이 그것이다.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철저한 비타협의 선비정신으로 불굴의 실천과 행동주의에 일관했던 선생의 생애는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서 진보적 유학정신과 일치시킨 보기드문 완인의 형상으로서 길이 민족의 사표가 될 것이다.

연보

1879년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에서 출생. 본관 의성(義城), 호 심산, 별호 벽옹
1905년
이승희와 함께 을사오적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함
1908년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고 구습 타파·계급 철폐 등 애국 계몽운동 전개
1909년
일진회를 성토하는 건의서를 중구완과 신문에 낸 사건으로 체포됨
1910년
전국단연동맹 성주대표로 활약
1919년
3·1 독립선언 직후 파리평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곽종석·김복한 등 영남, 충청유림 137인이 서명한 독립체제서를 휴대하고 중국 상해로 망명 (제 1차 유림단사건)
1920년
중국정부 요인과 접촉하여 '중한 호조회'를 결성하여 한·중 양민족의 연대와 공동투쟁을 도모. 북경에서 박은식과 사민일보·신채호와 '천고' 발간
1927년
유림단사건 이후 거처를 중국으로 옮겨 국민회의와 임정 의별단에 참여하던 중 상해에서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 1년간 옥고를 치른 후 14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 옥중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옴. 이 시기에 심산선생은 일제의 변호사를 거부
1944년
비밀결사인 건국동맹의 남한대표로 추대, 이로 말미암아 다시 투옥, 옥중에서 해방을맞이함 해방후 민중당 당수로 추대되었으나 거절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치아래 좌,우익의 분열 대립을 초월한 민족의 대동단결을 촉구
1945년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을 반대, 이승만과 함께 반탁운동을 전개하다가 이승만의 반민족적 행위에 일침을 가하고, 김규식과 견해차이를 보임으로써 정치에 깊은 관여를 하지 않고 유림의 재조직과 성균관대학의 재설립에 주력함.
1946년
성균관대학 초대 학장으로 취임한 이후 분단이 가시화되자, 단정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7거두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자주적인 통일정부수립에 헌신의 노력을 기울임.
1951년
[이승만 하야 경고문]발표
1952년
국제 구락부사건으로 두번의 옥고를 치름
1957년
자유당정권의 압력으로 본교등 모든 공직에서 추방당함. 이후에도 선생은 보안법개악 반대투쟁과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을 지도함.
1962년
5월 10일 84세로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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