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는 세상 곳곳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목소리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의의가 있다.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는 그 뒤에 숨겨진 맥락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려 노력한다. 이를 시청하는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잠시 멈춰 서서 세상을 이루는 다양한 목소리에 집중해 본다. 더 나아가, 세상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듣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이렇듯 뉴스는 세상의 이야기를 전할 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역할을 한다. 이번 <인물포커스>에서는 뉴스와 시청자 사이를 잇는, 앵커로 활동 중인 유다원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무용학과와 신문방송학과를 복수전공한 유다원입니다. 아나운서를 꿈꿨던 대학생 시절을 지나 2013년 본격적으로 방송의 길을 걷게 됐어요. SBS를 비롯해 지역 민영방송으로 알려진 UBC 울산방송에서 아나운서로 일했고요. 이후 YTN으로 이직해서 앵커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 YTN || 방송국과 시청자 사이, 신뢰의 다리를 놓는 아나운서 아나운서는 단순히 뉴스를 읽는 사람이 아니다. 이들은 정보 전달의 최전선에 서서 매일 전 세계의 소식을 자신의 목소리로 전한다. 때로는 방송국을 대표하고, 때로는 시청자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한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도 무게를 두고 신중히 전달하는 이들의 목소리에는 책임감과 신뢰가 담겨 있다. 아나운서라는 직업은 단순한 전달자를 넘어, 시대와 대중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아나운서는 방송국과 시청자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아나운서는 뉴스부터 매거진 프로그램이나 시사, 교양, 음악,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라디오 DJ, 교통, 날씨 등 전문화된 분야까지 폭넓은 업무를 담당해요. 결국, 어떤 프로그램을 맡더라도 그 방송국을 대표해서 시청자를 만나게 되는 거죠. 이렇게 아나운서가 방송국을 대표할 때도 있지만 반대로 시청자를 대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해요. 아나운서는 방송에서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대신 해소해 줄 수 있어요. 가령 한 분야의 전문가나 기자가 방송에 출연하면, 아나운서는 시청자의 관점에서 궁금한 것들을 대신 물어보거나, 시청자가 알고 싶어 하는 정보를 끌어내기 위해 질문을 해요. 그래서 아나운서는 방송국과 시청자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라고 생각해요. | 현재 YTN의 메인 뉴스 프로그램 <뉴스NIGHT> 앵커로 활약하고 계십니다. 아나운서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업무 중 ‘뉴스 진행’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뉴스’라는 아나운서의 메인 업무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어요. 세계 각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체크하고 공부하면서 나를 단단하게 다지는 게 좋았거든요. 전 세계 주요 뉴스를 제 목소리로 시청자들에게 전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어요. 매일 비슷한 뉴스를 진행하면 지루하지 않냐는 질문도 종종 받아요. 그런데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크고 작은 이슈를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책임감을 가지고 전달하는 뉴스만의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 매일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중립이라고 생각해요. 뻔한 답일 수는 있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중요한 법이잖아요. 아나운서는 민감한 사회 이슈를 다룰 때가 많아요. 직접 글을 쓰는 기자나 작가도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시청자들은 앵커의 입을 거쳐서 뉴스를 접하기 때문에 앵커로서 이러한 부분을 더욱 신경 쓰려고 해요. 물론 앵커의 시선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순간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순간에는 중립적인 자세로 다양한 의견을 들어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실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뉴스에 대한 판단은 소식을 접한 시청자가 직접 하는 것이고요. || 세상을 잇는 목소리, 중립의 무게 YTN의 메인 앵커로 활동 중인 그는 특히 뉴스 진행을 “단순한 일상의 반복”이 아닌 “세상과 끊임없이 연결되는 과정”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중심에는 ‘중립’이라는 변치 않는 원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양한 의견과 사실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전달하며, 시청자들이 스스로 가치를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가 말하는 앵커의 직업의식은 신뢰와 책임감의 무게로 빛나고 있었다. | 아나운서를 준비하던 시절, 힘든 시기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 과정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아나운서를 준비하던 시기에는 늘 불안하고 힘들었던 것 같아요. ‘내가 언제 방송을 할 수 있을까?’ 조급했고 ‘합격하더라도 내가 방송을 잘할 수 있을까?’ 의구심도 들었어요. 하지만 이러한 마음을 극복할 방법은 오로지 연습뿐입니다! ‘연습만이 살길’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실력을 갖추고 기본기를 다지면 불안함과 힘듦은 반으로 줄어들더라고요. 아나운서를 준비할 때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나의 확고한 가치관대로 나아간 게 도움이 많이 됐어요. | 직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나만의 개성을 찾고 차별화를 이뤄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유다원 동문은 이 과정에서 어떤 노력을 기울이셨나요? 아직도 가장 많이 고민하는 부분이에요. 차별화를 위해 자신만의 개성을 찾아야 한다는 말을 아나운서를 준비할 때부터 들었어요. 스스로 저에게 맞는 이미지를 찾기가 어려워서 주변에 이러한 질문을 종종 하곤 했어요. 제가 지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들었던 대답은 신뢰감 있는 이미지가 어울린다는 것이었어요. 시청자에게 신뢰감 있고 지적인 이미지를 어필하려면 그만큼 아는 것도 많고 공부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요. 이러한 부분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지금도 나아가는 중입니다. || 꿈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의 의미 꿈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설렘만큼이나 불안이 가득하다. “내가 이 길을 잘 가고 있는 걸까?”라는 마음속 의문이 때때로 나 자신을 흔든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 연습과 자신을 믿는 마음은 그 길을 조금씩 단단하게 만든다. 속도가 느린 것처럼 보여도 꾸준히 나아가다 보면 자신만의 색깔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실패와 불안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성실함은 나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매일 쌓아 올린 작은 노력은 결국 스스로를 지탱하는 큰 힘으로 돌아올 것이다. 흔들리는 청춘들에게 필요한 건 자신만의 속도로 걸어가는 용기가 아닐까. | 아나운서로서 스스로 생각하는 본인의 경쟁력은 무엇인가요? 생방송 대처 능력과 성실함을 꼽고 싶어요. 저는 대학생 때까지 발레를 전공하면서 무대에 설 일이 많았어요. 그런데 무대는 생방송과 참 닮았어요.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빠른 판단을 해야 할 때도 있어요. 그동안 쌓아온 무대 경험이 생방송을 진행할 때 많은 도움이 됐어요. 돌발 상황이 일어났을 때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 저만의 방법이 생겼거든요.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성실함도 일할 때 큰 도움이 됐어요. 남들보다 속도가 느려 보이고,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 같아 힘든 순간이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가진 무기는 성실함과 꾸준함이라고 되뇌었어요. 포기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끝까지 나아가는 힘을 키우자는 것이었죠. | 아나운서 일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은 언제인지 궁금합니다. 하루하루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생방송을 무사히 마쳤을 때인 것 같아요. 매일 생방송을 진행하다 보니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는 날이 많아요. 생방송을 시작할 때마다 느껴지는 긴장감, 한 번씩 크게 찾아오는 압박감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래도 열심히 준비해서 이 감정들을 이겨내고 뉴스 프로그램을 마쳤을 때 보람을 느껴요. 지금처럼 앵커 일을 할 때는 앵커가 직접 주제를 선정하고 기사를 쓰기도 해요. 제가 만든 앵커 리포트가 잘 방송됐을 때도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날도 많지만, 방송을 무사히 끝냈을 때의 쾌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예요. 그래서 방송을 ‘끊을 수 없는 중독’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아요. 사실 저에게 가장 힘이 되는 건 시청자들이에요. 무엇보다도 시청자들이 건네는 “잘 보고 있다”는 말 한마디와 응원은 언제나 가장 큰 보람입니다. | 아나운서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제가 아나운서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친구들과 농담삼아 했던 말이 있어요. “아나운서계의 송해 선생님이 되자”였는데요. 최장수 MC로서 꾸준히 방송에 임하셨던 송해 선생님처럼 활동하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시청자들을 오랫동안 뵙고 싶다는 마음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니까요. 때로는 주변에서 나를 흔드는 말이 들리고,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을 정도로 힘든 상황을 맞닥뜨릴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시청자들과 꾸준히 소통하고 싶다는 의지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어요. 시청자 곁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친근하고 따뜻한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요. || 끊임없이 나아갈, 아나운서로서의 여정 발레를 전공하면서 무대 위에서 쌓아온 경험은 돌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대처 능력을 길러주었고, 오랜 시간 길러온 성실함은 불안했던 시간을 극복할 힘이 되었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생방송의 긴장과 압박 속에서도 그가 느끼는 보람은 단순하다. 신뢰감 있는 목소리로 시청자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는 일. 일상의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온 그는 지금도 “끊을 수 없는 중독” 같은 방송을 이어가며, 시청자 곁에 오래 남는 아나운서가 되기를 꿈꾼다. | 마지막으로 성균관대학교 학우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이 현재 누리고 있는 대학 생활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이에요. 확실한 목표와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학생 때는 많은 걸 경험해 보면 좋겠어요. 여행이나 대외 활동, 동아리 활동도 좋아요. 사회에 나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지금 대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후회 없이 다양하게 해보세요. 소중한 대학생 시절을 행복하게 보내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 꿈을 향한 여정, 대학생 시절의 소중한 경험이 만드는 나 유다원 동문은 대학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본인의 시야를 넓힐 기회를 소중히 여길 것을 권했다. 그의 말처럼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목표가 아닌, 그 걸음 속에서 얻는 경험과 성장이다. 꿈을 향한 길이 때로는 불확실하더라도 그 과정에서의 경험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그동안의 발자취와 현재의 모습을 연결 짓는 유다원 동문의 메시지는 꿈을 향해 나아가는 청춘들에게 울림을 준다. 결국, 꿈을 향한 여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나름의 가치가 있는 발걸음이 아닐까. 성균웹진 이다윤 기자
스포츠 경기장의 열띤 분위기를 생생히 전해주는 스포츠 아나운서는 집에서 야구나 배구를 시청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오늘 소개할 동문, 신예원 아나운서는 우리 대학 영상학과를 졸업하고 연합뉴스TV 뉴스 캐스터를 거쳐 2022년 SBS 스포츠 아나운서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그녀는 현재 베이스볼S, SBS 진짜 야구, 레슨 팩토리와 주간 배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그녀의 진솔하면서 담백한 이야기를 바로 만나보자. Q.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SBS 스포츠 아나운서 신예원입니다. 20년도에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오랜만에 인연이 닿아 후배들에게 이야기를 드리는 것 같아 정말 반갑습니다. Q. 네 반갑습니다, 선배님은 처음부터 아나운서를 꿈꾸셨나요? 아닙니다, 방송국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처음부터 아나운서를 꿈꾸진 않았어요. 제가 아나운서에 도전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고학년이 되어가고 취업을 준비하면서 여러 길을 고민했습니다. 처음엔 영상 PD를 생각했고 크게 “내가 딱 아나운서다!” 하는 확신은 없었어요. 대학교에서 팀플을 하면서 사람들 앞에 서기도 하고 중학교 방송부에서 교내 아나운서를 맡았던 경험이 카메라 앞에 서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어요. 그러다 3학년 때 과감히 진로를 아나운서로 틀게 되었습니다. 한 번 마음을 먹으니까 조금이라도 빨리 경험을 해봐야겠다 싶어서 이때부터 아나운서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Q. 현재 베이스볼S나 SBS 진짜 야구, 레슨 팩토리와 주간 배구 등 다양한 종목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계시는데 이처럼 여러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기억에 남는 행사나 프로그램이 있을까요? 베이스볼 S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생방송이거든요. 많은 분이 아나운서라고 하면 앞에 프롬프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스포츠 방송에는 프롬프터가 없어요. 프롬프터는 앞에 카메라를 보고 아나운서가 이야기를 하면 화면에 대본이 올라가 외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는 장치를 말합니다. 그런데 스포츠 아나운서는 그날 경기 결과가 1분 1초에 따라 바뀌기에 대본이 즉석에서 나와야 해서 프롬프터를 쓸 수 없는 거예요. 바로 대본을 소화하고 만약에 대본이 부족하다 싶으면 본인이 직접 때워야 해요. 그래서 베이스볼S를 진행하다 보면 경기 속도라든지 진행 상황에 따라서 갑자기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죠. 인이어로 PD님 멘트를 계속 집중하면서 진행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직구장으로 가겠다고 이야기했는데 갑자기 아니라고 대구로 넘겨달라고 하는 변수들이 흔히 생겨요. 그러면 저도 버벅거리고 표정에서 동공이 흔들리고 이럴 때가 있답니다. 선배들이 끝나면 “너 그때 진짜 당황했지” 이러면서 놀리고 집에 오면 가족분들도 그때 왜 갑자기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냐 하기도 해요. 내부 사정은 나만 아는 이야기라 조금 억울한 구석도 있지만요.(웃음) 처음에는 티가 많이 났는데 이것도 시간이 지나고 여유를 갖게 되면서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면 베이스볼S를 하는 모든 순간이 저에겐 에피소드였어요. 스포츠 아나운서를 하고 싶은 분들이 만약에 이 글을 보고 계시다면 순발력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전해드립니다. Q. 아나운서의 길도 아주 다양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스포츠 아나운서를 하시게 되었는지 알려주세요. 처음부터 스포츠 아나운서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뉴스 캐스터도 하고 작은 방송국에서 다른 일도 진행해 보면서 여러 경력을 쌓았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좋은 기회를 잡아 스포츠 아나운서로 올 수 있었습니다. Q. 선배님만의 특별한 공부 방법이나 자세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멋모르고 무식하게 시작했던 게 중요한 포인트였다고 생각해요. 조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준비생이 워낙 많다 보니 딱 몇 년을 준비하고 안 되면 다른 걸 해야지 이렇게 하는 분들이 많거든요. 현실적으로 맞을 수 있고요. 근데 저는 이것을 정해두면 스스로 조급하게 만들지 않을까 싶어 일단 해맑게 “시작해 보자” 했습니다. 무작정 지원도 하고 많이 떨어져도 보면서 막연히 “난 언젠가 잘될 수 있을 거야” 되뇌었어요. 무모하게 취업 준비 기간을 버텼던 것이 아나운서가 되는 데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Q. 아나운서 중 특히 스포츠 아나운서는 말씀해 주신 것처럼 고정 TO가 있지 않다 보니 여러 친구들이 힘들게 준비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께서는 이를 이겨낼 방법으로 ‘해맑음’을 말씀해 주셨는데 선배님의 해맑음의 원천은 어디서 올 수 있었을까요? 준비를 열심히 하다 보면 기회는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에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아나운서 중 딱 스포츠 아나운서를 원하는 분이 있어도 저는 절대 기회에 제한을 두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방송 아나운서 관련된 직군이라면 다 도전해 본다는 생각으로 기다려야 기회가 찾아올 때 잡을 수 있어요. 아나운서 직업 특성상 뽑는 것이 불규칙하다 보니 스포츠 아나운서만 해야겠다가 아니라 기상캐스터도 뜨면 지원해 보고 뉴스캐스터 아니면 MC 등 작은 무엇이라도 해보면서 경력을 쌓다 보면 방송 능력과 실력이 자기도 모르게 레벨업이 되어 있을 거예요. 그렇게 꿈꾸는 자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관련된 경험을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면 내 길을 한정 짓지 말고 언제든 도전해 보자. 그리고 그래야만 고된 취업 준비 기간을 버틸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Q. 선배님은 원래 스포츠를 즐겨 보는 사람이었나요? 저는 처음 아나운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스포츠 아나운서를 할 줄은 몰랐어요. 스포츠라는 분야는 아예 생각에 없는 분야였거든요. 지원을 하는 순간까지 야구나 배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어요. “내가 지원하면 뽑힐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떨어지더라도 지원해 보고 떨어지는 게 낫다 싶어서 지원했습니다. 면접장에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스포츠 아나운서를 꿈꾸는 분들이니까요. 제가 붙을 수 있었던 이유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회사 입장에서 스포츠를 잘 안다는 게 큰 장점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들어오면 얼마든지 공부해서 준비를 할 수 있고 저만의 밝고 새로운 이미지를 회사에 주고 싶다” 는 느낌을 풍긴 것을 좋게 봐주셨다고 하더라고요. “입사하면 나 진짜 열심히 배우고 공부하겠다 대신 나는 이전에 이런 경험이 있어서 생방송을 잘할 수 있고, 순발력도 있고, 흡수력도 빠르고, 인터뷰도 적극적으로 잘할 수 있다”. 이런 본인만의 경력과 모습을 녹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살면서 스포츠 아나운서를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지만 이제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스포츠를 공부하고 즐겨 보는데 너무 재밌고 잘 맞다고 느껴요. 흘러가는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Q. 스포츠 아나운서라는 직업 특성상 여러 지역으로의 이동이 많은데, 이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에피소드가 많은데 막상 말씀드리려니 잘 생각 나지 않네요. 지역 이동이 많다 보니 막차를 놓치는 경우가 많아요. 경기가 길어지거나 변수가 생겨 일정이 길어지면 숙소를 하루 연장해서 자고 와야 할 수도 있고 그런 점이 여타 직업군과 다르다고 느꼈어요. 어느 날은 광주에 있다가 또 어느 날은 대구에 있으면, 각 구장의 색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다양한 지역 팬들을 만나는 것이 저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것 같아요. 잦은 이동을 꺼리지 않는 사람이 스포츠 아나운서를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야구 리포팅을 하다 보면 리포팅 내용을 취재해서 한 1분 30초 2분 정도 내용을 작성하고 생방송으로 나가는 형식입니다. 이때 카메라가 멀리서 저를 잡고 있을 때가 있어요. 그러면 제가 방송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분들이 간혹 앞에서 시야를 막는 분들이 계세요. 그럼 저는 외운 거를 아무렇지 않게 얘기를 해야 하는데 갑자기 시야가 바뀐다거나 누가 나를 치고 지나간다거나 하면 외운 거를 다 까먹을 때가 있어요. 방송 초창기에는 멘붕도 오고 떨려서 수첩만 보고 읽은 적도 참 많았답니다. 덜덜 떨면서 그냥 수첩만 보고 읽은 적도 있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많이 실수도 해보고 스스로 무너져도 보고 깨달아도 보면서 조금씩 단단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선배님들 얘기를 들어보면 다들 많이 우셨다는 거예요. 어떤 날은 최선을 다해 준비했지만, 막상 방송에서는 노력한 부분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거나 실수한 장면만 비칠 때가 있어요. 그런 날엔 방송을 마치고 집으로 운전하면서 오는 길이 울적해요. 참 속상하죠. 그런게 쌓이다 보면 차츰 이 감정을 어떻게 빨리 털어낼 수 있는지 알게 되고, 다음번엔 조금 더 나아진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Q. 선배님의 대학 생활이 궁금합니다. 제 대학 생활을 돌이켜보면 가장 먼저 하이클럽(HI-Club)이 떠오릅니다. 교환학생 친구들을 도와주는 하이클럽 생활을 열심히 했어요. 하이클럽 같은 학생단체에 가면 다양한 과의 친구들을 만나잖아요. 여러 과가 섞여 있고 율전 캠퍼스 친구도 있고 다양한 친구들을 만났어요. 저는 아직까지 제 절친들이 하이클럽 때 만난 친구들이에요. 성균관대 하면 영상학과도 영상학과대로 친한 친구들이 많지만 하이클럽 생활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다른 친구들은 뭐 준비하는지 얘기도 들으면서 그런 시간들이 재밌었고 친구들에게 자극을 되게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영상 쪽 말고도 다른 게 없을까 눈을 넓히다 보니까 아나운서까지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이클럽 활동을 하다 보면 교환 학생 친구와 대외적으로 앞에 나가 이야기를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그런 부분이 아나운서의 길을 가는데 도와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보석 같은 존재였어요. Q. 선배님은 외향적인 편이신가요? 저는 사실 극 I입니다. 강아지랑 집에서 쉬며 보내는 걸 좋아하죠. 일할 때 에너지를 다 쏟아내고 집에 오면 기진맥진 쓰러집니다. 그래서 제 성격과 반대되는 직업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낯을 많이 가리고 사람 많은데 별로 안 좋아하고 시끄러운 것도 안 좋아하고 그렇지만 막상 주목받는 건 좋아하는데 또 너무 주목받는 건 싫어하고 애매한 포지션에 있는 사람 같아요. 입사 초창기에는 쉴 때 거의 집에만 있었어요. 그렇지만 제가 스물여덟이잖아요. 어느 순간 내가 일만 하고 20대가 사라지는 게 아쉬운 거예요. 일만 하다가 스물여덟이 끝나가고 있잖아요. 그게 억울한것 같아서 요즘은 억지로라도 쉴 때 친구들에게 연락하고 밖에 나가서 분위기 좋은 카페를 갔다 오거나 마음 정리하기 좋은 책을 읽는다든지 하면서 여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태도의 말들』을 재밌게 읽었어요. 다행인 건 제가 직업 자체로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일하는 편이더라고요. 업무 모드가 오프 됐을 때는 정반대의 사람으로 돌아오고요. 체력을 완전히 쏟을 때와 체력을 비축할 때 온도 차가 굉장히 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Q. 선배님은 어떤 아나운서로 사람들에게 남고 싶으신가요? ‘찾아서 보게 되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요. 3사 중에서도 베이스볼S, 아이러브 베이스볼 베이스볼 투나잇 등 다양한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이 있는데 “오늘 신예원이 진행한대” 하면은 믿고 볼 수 있는, 자연스럽게 채널을 돌리게 하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습니다. 팬들의 마음을 대변하면서 전문성을 갖고 정보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스포츠 아나운서가 되고 싶습니다. Q. 마지막으로 아나운서를 꿈꾸는 학교 후배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아나운서, 어떻게 보면 굉장히 화려한 직업으로 비춰집니다. 아나운서를 꿈꾸는 많은 분들이 이런 면에서 매력을 느꼈을 거라 생각해요. 아나운서를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나운서가 되어서든, 다른 분야에 도전하든, 자신을 사랑하고 스스로를 믿는 마음이 있어야 흔들리지 않고 일을 해 나갈 수 있어요. "나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다, 나만큼 대단한 사람은 없다"라는 마음가짐으로 기회의 문을 두드리며 열심히 준비해 나가길 바랍니다. 특히 스포츠 아나운서를 꿈꾸는 분들에게는 스포츠에 대한 꿈을 절대 놓지 말고, 관련 정보를 꾸준히 따라가며 그 재미를 잃지 않았으면 해요. 다른 기회가 찾아온다면 주저하지 말고 도전해 보면서 경력을 쌓아 가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찬란한 대학생 시절을 아낌없이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대학생 때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너무 돌아가고 싶어요. 대학생 당시 부모님이 맨날 지금만큼 행복할 때가 없다 지금 만큼 걱정 없을 때가 없다 그런 얘기를 하셨는데 안 믿었어요. 저는 할 과제도 많고 시험도 쳐야 하고 취업 준비도 해야 하는데 도대체 이게 왜 힘들지 않고 좋은 거지 생각했습니다. 근데 행복한 시기였던 게 맞더라고요. 그 시절에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휴학도 해볼 수 있으면 해보고 교환 학생도 갈 수 있으면 가고 새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을 잔뜩 경험하고 사회로 나와도 절대 늦지 않으니, 여러분이 대학 생활에서 많은 추억을 만들어 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성균웹진 이준표 기자
흑연의 한 층을 분리해 낸 나노물질인 그래핀. 탄소 원자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벌집 모양의 평면 물질, 즉 이차원 소재다. 이와 같은 이차원 소재와 다른 종류의 이차원 소재가 결합하게 되면 이를 헤테로구조체라고 부른다. 올해 초 이차원 양자 헤테로구조체 연구단(2DQH; Centerfor2D QuantumHeterostructures)이 새롭게 출범했으며 그 첫 단장을 본교 신현석 교수가 맡았다. 인터뷰를 통해 연구단과 그 비전에 대해 알아보자. ➔ 이차원 양자 헤테로구조체란 무엇인가요? 연구단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연구단 이름이 ‘2차원 (이차원) 양자 헤테로구조체 연구단’이라 이 질문을 종종 듣습니다. 2차원, 양자(quantum), 헤테로구조체(heterostructures)로 나눠서 설명하면 이해하기 조금 쉬울 것 같네요.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래핀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데요, 그래핀과 같은 원자층 두께의 소재를 통틀어 2차원 소재라고 합니다. 이런 소재를 A4 용지 묶음처럼 수직으로 쌓으면 수직 헤테로구조체, 레고 블록을 위로 쌓지 않고 옆으로 연결할 때 서로 다른 레고 블록을 연결한 것처럼 2차원 소재의 한 층에서 서로 다른 소재가 결합해 있으면 수평 헤테로구조체라고 합니다. 이런 헤테로구조체는 두 구조가 결합한 부분에서 다양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연구단은 그래핀과 육방정계 질화붕소 (hexagonal boron nitride, hBN)의 헤테로구조체와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양자 현상 연구에 관심이 있어요. 최근 신문에도 많이 나오는데, 양자 컴퓨팅, 통신, 센싱 등과 같은 응용을 목적으로 한 기본적인 물리 현상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차원 양자 헤테로구조체’ 연구단입니다. ➔ 연구단의 대표적인 연구 활동을 소개해 주세요. 저희 IBS 연구단은 제가 UNIST에서 이직하면서 올해 3월 1일에 출범했습니다. 연구단의 연구 활동은 이제 막 시작했지만 매우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UNIST에서는 그래핀을 비롯한 다양한 2차원 소재들을 합성하고 에너지 및 전자소자의 응용을 연구해 왔습니다. 기초 연구부터 다양한 응용 연구에 관심이 있어서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온, LG에너지솔루션 등의 기업과도 활발한 공동연구를 진행했습니다. IBS 연구단을 시작하면서 이러한 연구 외에도 기초연구에 좀 더 집중하고 연구의 관심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BCN 구조체, 그래핀과 hBN의 헤테로구조체, 위상 절연체/위상 준금속 등의 전이금속 칼코젠 화합물과 같은, 아직까지 연구자들이 만들지 못했던 2차원 소재를 합성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들의 양자 현상을 탐색하고 미래 양자 기술에 응용하기 위한 기반 기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연구단 단독으로 할 수 없고 다양한 공동연구를 통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이를 위해 국내외 많은 연구자와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고, 특히 이미 갖추어진 국제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미국, 영국, 프랑스, 싱가포르에 있는 많은 대학 연구진과 밀접한 협력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 하나의 연구는 어떤 과정과 방법을 통해 진행되나요?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기본적인 4단계 과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한 분야의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분야에서 보고된 많은 문헌을 조사하여 어떤 문제 및 이슈를 해결할 것인지 목표를 정합니다. 이러한 목표가 잘 설정이 되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험을 수행할지 실험 방법을 설계합니다. 그리고 실험을 수행한 후 데이터를 얻고 분석합니다. 데이터 분석을 통해 실험 방법을 수정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데이터를 논리적으로 해석하고 우리의 결론을 만든 후, 논문을 작성합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대학원에 들어와 박사과정을 하는 이유는 독립적인 연구자가 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저널에 논문을 몇 편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연구자로 성장하기 위한 훈련을 받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위의 연구 과정을 스스로 수행하여 논문까지 쓸 수 있는 자질을 만드는 것이죠.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선배나 동료, 지도교수, 공동연구자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 연구단에서 이루어진 연구들은 어떻게 활용되나요? 저희는 새로운 소재를 만들고 이들의 물리화학적인 특성을 밝히는 연구를 합니다. 물론 저희가 일부 응용 연구도 진행합니다. 저희가 이러한 소재들을 합성하고 물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면, 이것을 보고 다른 연구자들이 다양한 응용에 대한 연구도 진행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2020년에 밀도가 높은 비정질 질화붕소 박막을 합성하고 유전상수가 2.0보다 낮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만의 TSMC에서 반도체에 적용하기 위해 공동연구를 제안하였고, 실제 TSMC 자체적으로 관련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국내 모 반도체 회사들에서도 BEOL (Back-End-Of-Line) 초저유전체나 Capping layer로 사용하기 위해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당장 상용화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소재가 실제 제품에 적용될 때까지 많은 난관을 거쳐야 합니다. 작년 노벨 화학상의 주제였던 양자점도 처음 개념이 나오고 양자점이 합성된 후 수십 년이 지난 후에 실제 제품에 적용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 본 연구단에서 연구하는 분야의 앞으로의 비전과 연구단의 목표가 궁금합니다. 10년 후, 이차원 양자 소재 혹은 양자 헤테로구조체 하면 떠오르는 연구단이 되고 싶습니다. 관련 연구의 세계적인 허브가 되어 우리가 만든 소재를 전 세계 연구자에게 공급하고 우리 소재들로부터 후속 연구가 진행되는 연구단을 만드는 것이 앞으로의 비전입니다. 이러한 비전 아래 연구단 목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이차원 양자 소재의 전주기 연구’ 체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양자 현상을 보이는 이차원 소재를 만들고 양자 정보 기술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반 기술까지 완성하고 싶습니다. 첫 단계는 양자 현상을 보이는 이차원 소재의 전구체를 설계하고 합성하는 것입니다. 전구체는 2차원 소재를 합성하기 위한 출발 물질입니다. 이 전구체로부터 이차원 양자 소재를 고품질로 대면적 성장합니다. 그다음은 양자 현상을 관찰하고, 그러한 현상으로부터 양자 기술로의 응용 가능성도 검토하려고 합니다. 다양한 양자 현상 중 저희는 현재 이차원 양자소재로부터 어떻게 양자 광원을 생성하고 어떻게 스핀 큐빗을 만들지에 관심이 많습니다. ➔ 연구단만의 자랑거리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연구단 자랑 부탁드립니다. 저희 IBS 연구단에서는 연구를 수행하기 위한 많은 첨단 장비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양자 관련 연구를 수행하기 위한 장비들을 구축 중이고요. 그리고, 공동연구 네트워크가 우수하다는 점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최근 들어 우수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활발한 공동연구가 필수적인데, 우리 연구단에서는 국내외 관련 전문가들과 네트워크가 잘 구축되어 있어서 우리가 잘 못하는 부분은 공동연구자들과 협력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연구단의 연구자들이 다양한 분야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과 연결됩니다. 해외 공동연구자들도 많아서 공동연구를 위해 우리 연구단 연구자들이 방문하는 기회도 많습니다. 글로벌 경험을 가지는 것이지요. 물론, 외국 석학들도 우리 연구실을 많이 방문합니다. 저희 연구진들과 토의도 하고, 때로는 함께 등산도 하면서 어울립니다. 대학원생들은 해외 석학들과의 어울림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는 기회도 됩니다. ➔ 연구단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자격이나 능력이 있나요? 어떤 학생이 연구단에 오면 좋을까요? 열정이 있는 학생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요? 나도 해 보겠다고 도전하는 열정이 있는 학생이면 충분합니다. 전공이나 지식은 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연구단은 물리, 화학, 재료, 화공, 전자 등 많은 분야에 걸쳐 있고, 융합 연구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연구원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소위 좋은 저널에 논문 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보다는 ‘의미 있는 연구’를 하는 연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좋은 저널에 논문을 쓰는 것을 소홀히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저널에 논문을 쓰면서 성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다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는 연구가 어떻게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지, 우리 과학기술에 어떻게 공헌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으면 합니다. ➔ 연구단 홈페이지: https://www.ibs.re.kr/2dqh/ 성균웹진 이주원 기자
이번 기사에서는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은 보드게임 <젬블로>를 창시한 젬블로컴퍼니 오준원 대표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는 창업을 꿈꾸는 학우들에게 1인 스타트업이 겪는 현실과 도전 과정을 가감 없이 전한다. 오준원 대표는 지금도 다양한 보드게임을 개발하고 활발히 활동을 이어가며 보드게임 산업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데 노력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Q.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성균관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젬블로컴퍼니를 운영 중인 오준원입니다. Q. 처음 보드게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대학교 시절, 저는 경제와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게임 개발 생각을 처음부터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전공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고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했죠. 여타 친구들과 같이 CPA를 공부했습니다. 그러던 중, 병역특례로 IT 회사에 취직하게 되면서 여유가 생길 때는 취미로 좋아하던 게임들도 해보고 인생의 진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시간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스타크래프트나 디아블로 같이 온라인 게임을 좋아했고 보드게임은 잘 알지 못했어요. 그러다 2001년부터 보드게임 카페 붐이 일었고 제가 IT회사를 다니던 시기에도 보드게임 카페들이 많이 있어서 주말에 친구들과 보드게임 카페를 한 번 가보게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당시 저는 보드게임이라면 부루마블, 장기, 체스 등 단순한 것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카페에서 접한 여러 보드게임은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테마나 장르가 무척 다양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플레이했어요. 온라인 게임의 경우 여러 개발자가 참여하는 것이 보통인데 보드게임은 1인 개발자가 만들 수 있다는 점이 크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무렵부터 퇴근 후나 주말에 시간을 쪼개 보드게임 아이디어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 <젬블로> 창업스토리 2003년 말, 아버지의 조력을 받아 '젬블로'라는 보드게임을 출시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의 평가는 냉정했어요. 쌀쌀히 외면받았죠. 처음 하는 일이라 시행착오도 많았고 사업 경험이 없던 저는 콘텐츠 제작에 3분의 1이라는 원칙도 무시한 채 돈을 다 끌어다 써 보드게임 5,000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팔리지 않아 보관비 등으로 계속 빚이 늘어났어요. 오래 공들여 만든 보드게임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니 참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힘들다고 쉽게 포기해버리면 안된다는 각오로 시작한 일이었고 제가 만든 보드게임이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2004년부터 저는 전국의 보드게임 카페와 대학교 동아리,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제 보드게임을 갖고 찾아가 직접 홍보를 시작했습니다. 마치 영업사원처럼 보드게임을 가져가 20~30명 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홍보하고 저의 보드게임 대회도 열고, 게임 규칙을 설명하며 체험하게 했습니다. 보드게임의 경우 티비나 다른 매체에서 짧은 시간에 광고하기 어려운 특성이 있다고 생각해 이렇게 전국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2006년 저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독일 에센 보드게임 박람회에서 사람들이 제 게임을 좋아할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요. 큰 결심 끝에 큰 비용을 들여 독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 밖의 결과를 얻었습니다. 가져간 게임 300개가 3일 만에 완판된 거예요. 그때의 성취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외화로 환산하면 박람회를 위해 충당한 큰 비용을 모두 충당하고도 남는 큰돈이었고, 지금까지의 피땀 눈물을 보상받는 기분이었습니다. 또 현장에서 제 게임에 관심 가져주시는 분들을 보면서 자신감을 얻었죠. 이때의 경험이 보드게임 개발을 계속하게 만드는 중요한 동력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후에도 꾸준히 박람회에 참가하다 2008년에 한 유럽 보드게임 출판회사에서 제 게임을 내보고 싶다는 제안을 주셨습니다. 큰 기회를 얻은 셈이죠. 그렇게 젬블로는 유럽 44개국 유통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유럽 전역으로 수출되었습니다. 물론 해외 수출이 무조건 수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내에서 '유럽 수출 게임'이라는 명성을 마케팅에 활용할 수 있게 되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후 국내에서도 매출이 늘어나며 지금의 젬블로컴퍼니로 성장하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제가 배운 것은, 단순히 게임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그 게임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알리는가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게임 개발은 마치 아이를 낳는 것과 비슷합니다. 많은 인디개발자가 게임을 만들어놓고는 또 다른 개발을 하느라 마케팅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중요하듯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리는 과정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게임을 만들어도 사람들은 몰라요. 1인 스타트업을 시작하게 된다면, 자신이 기획, 마케팅, 자금 관리까지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만든 콘텐츠를 키우는 것은 오롯이 내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세요. 저도 직접 발로 뛰었던 경험이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합니다. Q. 스타트업을 고민할 때 본인의 아이디어에 대해 어떻게 확신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을까요? 선배님께서는 그런 확신이 있었나요? 후배들에게 조언할 때 이게 참 어렵습니다. 무모하게 행동하라고 말할 수도 없고, 지나치게 조심하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부분은 이성과 어떤 동물적 감각, 직감이 교차해야 하는 포인트 같아요. 근데 무엇보다 중요한 1번이 있습니다. 공감 능력입니다. 내가 사람들과 얼마나 공감이 잘 되는 사람인가. 무슨 얘기냐면 나는 내가 별문제 없다고 생각하는데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나보고 독특하대요. 그리고 이게 나쁜 게 아니라 비범한 걸 수도 있거든요. 근데 어느 쪽이든 사업적으로 말씀드리면 일반 사람들의 공감 포인트에 컨택이 안되는 거에요. 이런 사람이 사업을 시작하면 큰일 날 수 있어요. 내가 무엇을 낼 때 나만 좋으면 안 되거든요. 내 수준에서 내서도 안 돼요. 한마디로 소비자에 맞출 줄 알아야 해요. 그런 측면에서 공감 능력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장의 필요가 있으면 이 시장의 필요에 딱 맞춰도 안 되고요. 너무 올라가 있어도 안 돼요. 현재의 니즈보다 살짝 위에 있어야 돼. 그래야 사람들이 와요. 사업이란 결국 팔아야 하는 게 목적이라 모든 콘텐츠는 소비되어야 하죠. 창작에서 나만의 만족을 찾으실 분은 예술을 해야 합니다. 그런 분들이 사업을 하시면 자신의 창작물이 낸 시장에서의 결과에 크게 실망하실 수 있습니다. 시장의 요구를 맞출 수 있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Q. 젬블로 이후에 개발하신 게임 중에서 애정이 가는 보드게임은 무엇인가요? 한글 보드게임 '라온'입니다. 자음과 모음을 이용해 언어를 연상하고, 제한된 자음 모음으로 단어를 많이 또는 먼저 만들면 승리하는 게임입니다. 처음 기획을 2007년 말에 시작해 2010년에 출시했습니다. 아이디어 구상은 단순히 호기심에서 출발했습니다. “왜 한국에는 한글 게임이 없을까? 해외에는 알파벳 게임이 수천 종인데 말이야.” 그러다 이내 왜 그런지 알았습니다. 한글 게임을 만드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타일을 어떻게 디자인할지부터 문제에 봉착했어요. 예를 들어, 초성으로 쓰인 'ㄱ'과 받침으로 쓰인 'ㄱ', 그리고 쌍자음 'ㄲ'까지 크기가 다 다르다는 점 등 난관에 계속 부딪혔죠. 한글의 모음들은 알파벳의 모음들처럼 같은 크기의 타일에 인쇄할 수 있는 일정한 형태도 아니었고요. 알파벳처럼 나열식으로 단어를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초성, 중성, 종성이 결합한 글자의 형태여야 하는 점이 타일 게임으로 만들기 상당히 까다로운 점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한글 게임이 그동안 나오지 않았던 겁니다. 보통의 아이디어로는 만들 수 없으니까요. 또 다른 배경으로, 우리나라의 각종 매체에서 90년대까지 한자들을 많이 사용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2000년대 초반부터 신문, 방송 등에서 한글 표기가 중심이 되었죠. 이 흐름이 제게는 좋은 타이밍이었던 셈입니다. 만약 90년대에 한글 게임을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면 아마 게임을 만들지 못했을 거예요. 이렇게 오랜 연구 끝에 한글게임 ‘라온’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실과 더불어 어린 친구들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즐겁게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며 라온은 저에게 애정이 가는 보드게임이 되었습니다. Q. 보드게임 제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세 가지는? 재미: 당연히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수많은 테스트와 고민을 합니다. 사람들이 재밌어하는 포인트가 무엇인지 항상 생각해요. 디자인: 구성물 디자인, 아트워크 등 시선을 끌 수 있어야 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보고 갑니다. 가격: 보드게임의 경우 생각한 가격대를 맞춰내기 위해서 구성물을 어떻게 콤팩트하게 가져갈까 고려합니다. 재미나 디자인을 잃지 않고 가격을 맞춰내는 것이 어렵지만 필요한 작업입니다. Q. 최근에는 어떤 사업을 진행 중이신지 궁금합니다. 최근에는 유명 IP와 결합해 보드게임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배틀그라운드' 보드게임을 만들었고, 몇 년 전에는 '쿠키런 킹덤' 보드게임을 출시했으며, 그 사이에는 '라그나로크' 보드게임도 만들었습니다. 한국 유명 애니메이션 '신비아파트'를 기반으로 한 보드게임도 제작했고, 방탄소년단(BTS)과 함께 '라온 위드 BTS'라는 게임을 해외로 수출한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특정 팬층을 겨냥한 게임을 꾸준히 개발하고 있죠. 패밀리 게임뿐만 아니라 교육과 연결된 기능성 보드게임도 개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희가 직접 만든 건 아니지만 '플립'이라는 보드게임은 게임을 하고 나면 서로의 성향을 알 수 있게 되어 있어요. MBTI처럼 각자의 성향과 장단점을 파악하게 도와주는 게임이죠. 저희는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하는 B to G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백제세계유산센터에서 예산을 받아 '백제세계유산 탐험대'라는 게임을 개발했습니다. 백제의 세계유산을 탐험하고 발굴하는 내용으로, 공공기관이나 학교에서 문화유산을 재미있게 보여주는 도구로 사용되며 전국대회도 열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사로잡는 건 스토리입니다. 드라마나 영화, 음악,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처럼, 스토리는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데 중요한 콘텐츠입니다. 개인 작가 한 명이 열심히 노력하고, 홍보하고, 다양한 일을 병행하면서 보드게임을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휴먼 스토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개인 작가들이 늘어나야 우리나라 보드게임 산업이 튼튼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처럼 스토리를 어떻게 부여할까 고민하면서 작년부터 '인디보드게임마켓'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국내에도 보드게임 관련 행사들이 있지만, 대부분 수입 게임 위주로 진행되다 보니 인디 보드게임 작가들이 중심이 되는 행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었습니다. 그래서 인디보드게임마켓 행사를 처음으로 개최했습니다. 올해에도 10월 12일부터 13일 이틀간 약 100 여명의 인디 작가님들이 새로운 보드게임을 선보입니다. 올해로 두 번째로 열리는 행사고 양재 AT센터 1층에서 진행되니 기회가 된다면 방문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이처럼 젊은 작가님들이 새로운 도전을 할 때, 관심을 비추고 응원해 주세요. 여러분의 작은 관심이 그 사람과 콘텐츠를 성장시키는 힘이니까요. Q. 젬블로를 즐겨하는 친구들에게 승리 전략이 있다면? 젬블로에서 승리하는 팁을 말씀드리면 첫째, 스타트 지점에서 게임판 중간까지 가장 빠르게 도달해라. 넓은 공간을 먼저 점령하세요. 인생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필요하듯이, 쭉 뻗은 타일로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둘째, 경쟁 상황에서 정면충돌을 피하라. 1 대 1 상황이라면 정면으로 맞붙어야 할 때도 있지만, 가능하면 중요한 승부 전에는 다른 색깔 블록과 맞붙어서 이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방의 길을 막으면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습니다. 셋째, 틈새를 공략해라. 서로 다른 색깔 블록 사이의 틈을 잘 체크하며 지나가면, 막힌 길을 우회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틈을 잘 놓칩니다. 넷째, 큰 블록부터 처리하라. 작은 일에 매달리면 중요한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큰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나중에 작은 것들을 처리하세요. 이처럼 젬블로는 인생과 유사한 면이 많습니다. 그래서 인생 게임이에요. (웃음) Q. 대표님에게 보드게임이란? 저에게 보드게임은 플랫폼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처럼 모든 걸 담아내는 일종의 창처럼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그리고 나를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문이 되어줍니다. Q. 미래 CEO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는 먼저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실력을 쌓는 것과 함께 자신감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충분히 능력 있다고 스스로 믿을 수 있어야 해요. 다음으로 실력이 뒷받침되었다면 친구들은 어려운 환경을 인식해야 합니다. 실패를 경험했을 때 너무 자책하지 않도록 하세요. 나를 향한 평가와 비난을 견디세요. 소비자들은 검증된 것을 선호하고, 높은 눈높이를 가지고 있어서 시장에서 성공하기란 원래 매우 어려운 길입니다. 이를 위해 멘탈 관리가 되어 있어야 장기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버티고, 또 버틴다면 노력의 결실을 맺는 날이 올 겁니다. 이 기사를 읽고 있는 친구들 모두 나중에는 각자 영역에서 훌륭한 무언가를 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브레드이발소>는 천재 이발사 ‘브레드’와 이발소 직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애니메이션이다. 식빵, 컵케이크, 마카롱 등 다양한 종류의 디저트가 캐릭터로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2019년부터 TV, 넷플릭스, 유튜브 등 전세계 여러 플랫폼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무뚝뚝하지만 따뜻한 감성을 지닌 브레드, 열정 가득한 윌크, 시크한 성격의 초코 그리고 베이커리타운에 사는 귀여운 빵들의 이야기 <브레드이발소>를 제작한 정지환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안녕하세요. 애니메이션 감독 정지환입니다. <브레드이발소> 시리즈를 제작하면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어요.” <브레드이발소> 포스터 | <브레드이발소>는 디저트를 등장인물로 내세웠다는 점이 독특하게 느껴져요. 캐릭터에 대한 영감은 어디에서 얻으셨나요? 제가 미국에서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다가 2013년도에 귀국했어요.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는 빵집이라고 하면 대형 프랜차이즈 베이커리가 대부분이었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개인 제과점이나 디저트 카페가 많이 생겼더라고요. ‘이제 우리나라도 일본이나 유럽만큼 제과 업계가 활성화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에 시장 조사를 해보니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호빵맨이 눈에 띄었어요. 일본에서는 호빵맨이 장수 캐릭터로서 여전히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잖아요. 우리나라에서도 <날아라! 호빵맨>처럼 빵과 디저트를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브레드이발소>를 기획하게 됐어요. | 스토리 구상부터 애니메이션 작업까지 <브레드이발소>의 모든 과정을 감독님께서 도맡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작업을 하시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인가요? <브레드이발소>는 이발사 브레드와 그의 조수 윌크가 이발소를 운영하면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을 다뤄요. 권선징악형 스토리를 가진 애니메이션들과 달리 저희는 정해진 내용 구조가 없다 보니까 메인 스토리를 개발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썼어요. 에피소드마다 기발하고 재미있는 스토리가 필요하거든요. 항상 에피소드 소재에 대한 갈망이 있고 좋은 소재를 뽑아낼 수 있는 레퍼런스는 가리지 않고 찾아보는 편이에요. 제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에피소드가 가장 많고 언론에서 보도되는 사건들을 모티브로 삼는 경우도 있어요. 책이나 영화, 다른 애니메이션에서 영감을 받아서 만든 에피소드들도 있고요. 최근에는 이렇게 준비한 스토리를 시청자들이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연출의 완성도를 올리는 작업에 신경을 쓰고 있어요. 이야기의 흐름이 더욱 자연스러워 보였으면 해서요. | 직접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만든 에피소드가 많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에피소드가 실제 경험에 기반한 에피소드인지 궁금합니다. 대표적으로, 시즌1에서 인기가 많았던 ‘홍차의 달인’이라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홍차의 달인으로 불리는 홍차 가게 주인이 “우리 가게는 차를 팔지 않는다네, 돌아가게나” 이러면서 손님을 쫓아내는 장면이 나와요. 이게 제가 한국에서 창업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동네 커피숍에 갔다가 실제로 겪은 일이에요. 제가 한 커피숍에 들어갔는데 사장님께서 대뜸 자기는 커피를 팔지 않으니 나가라고 하시더라고요. 당황한 목소리로 사장님께 “그럼 여기는 뭐 하는 곳입니까?” 여쭤봤죠. 알고 보니 거긴 카페가 아니라 커피 원두를 뽑는 곳이었어요. 그냥 돌아가려던 찰나에 사장님께서 “잠깐!”하고 저를 불러 세우시더니 조그마한 에스프레소 잔에 블루마운틴 커피를 주셨어요. 그렇게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제가 원두커피 2만 원어치를 사든 채 가게를 나오고 있더라고요. 만화 같은 경험이었어요. 이것 말고도 미국에서 유학 생활하던 시기나 한국에서 창업하면서 겪은 일들이 에피소드에 구현된 경우가 많아요. ‘윌크의 이사’라는 에피소드도 제가 미국에서 원룸 구할 때 고생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에피소드예요. | <브레드이발소>가 어른들에게도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건 ‘기발하고 재미있는 스토리’가 주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독님만의 스토리 구상 방식이 있나요? 스토리를 개발할 때 기본적으로 ‘내가 봐도 재미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제가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를 두고 ‘아이들이니까 이 정도만 만들어도 괜찮을 거야, 어린이들은 이 정도 스토리면 재미있어 할 거야’ 이렇게 접근하는 건 교만한 거죠. 어린이들을 무시하는 마인드예요. 저는 누가 봐도 재미있는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써요. 제가 쓴 시나리오를 에피소드로 구현하기 전에 우리 회사 직원들을 각 팀에서 한 명씩 불러서 자체 시사회를 진행해요. 제 느낌도 중요하지만, 저와 대중들의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시사회에서 5점 만점에 3.5점을 넘긴 스토리만 에피소드로 제작해요. 3.5점을 넘기지 못한 시나리오는 기준점을 넘기기 위한 수정 작업에 들어가요. 이렇게 작업을 하기 때문에 <브레드이발소>가 어른들도 재미있어 하는 애니메이션으로 평가받는 것 같아요. 이 정도는 해야 아이들에게 떳떳한 작품을 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TV 방영을 통해 인기를 얻은 <브레드이발소> 시리즈는 극장판 런칭에도 성공하며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지난 9월 14일 개봉한 <브레드이발소: 빵스타의 탄생>은 <브레드이발소>의 두 번째 극장판으로 누적 관객 20만 명을 돌파했다. 극장판 1기 <브레드이발소: 셀럽 인 베이커리타운>에 이어 또다시 20만 관객을 기록하는 이례적인 성과를 거뒀다. K-POP 아이돌, 유튜버, 슈퍼모델, 액션 배우 등 다양한 직업과 매력을 가진 캐릭터들의 등장, 남녀노소 누구나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스토리와 함께 흥행에 성공하면서 어느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는 평이다. | <브레드이발소: 빵스타의 탄생>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다뤄온 기존 에피소드들과 결이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브레드이발소> 시즌1이랑 시즌2를 아직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시즌3을 보면 제가 시즌1처럼 만들려고 한 에피소드들이 꽤 있어요. 하지만 그런 에피소드들은 반응이 좋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시즌1은 시즌1의 추억으로 남겨놔야 되겠다, 다음 시즌에는 계속 진화해야 하는구나’ 깨달음을 얻었어요. 시즌1의 일상적인 에피소드들은 그때 처음 봤으니까, 임팩트가 강했던 거죠. 시즌1, 시즌2랑 비슷한 에피소드들을 지금 극장판으로 내놓으면 사람들이 안 좋아할 확률이 높겠다고 판단했어요. 작업을 하면서 그 차이가 느껴지더라고요. 극장에 내거는 에피소드들은 더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고 화려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브레드이발소: 빵스타의 탄생>이 개봉과 동시에 전체 박스오피스 2위를 기록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어요. 감독님께서 생각하시는 흥행 요인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희가 하나의 에피소드를 만들 때마다 시나리오나 콘티 수정을 수십 번씩 해요. 이렇게 공들여 만든 콘텐츠를 TV에서만 방영하는 게 아깝다는 생각을 자주 할 정도로 완성도 면에서는 자신 있었어요. 이 정도면 사람들이 극장에서 봐도 충분히 재미있어 할 만하다고 느꼈죠. 사실 극장판 1기를 올린 지 6개월밖에 안 된 시점에 바로 2기 <브레드이발소: 빵스타의 탄생>을 내겠다고 하니까 내부 반대가 있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재미있는 거 보러 극장에 오는 거지, 기간 맞춰서 극장에 오는 건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우리 작품을 재미있어 할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 극장판 2기 제작을 그대로 밀어붙였어요. 대신 극장판 1기 때 지적받았던 부분은 모두 수정하기로 했어요. TV 에피소드 오프닝을 그대로 쓰는 것에 대한 피드백이 있어서 극장판 오프닝을 새로 만들었고 에피소드 테마도 빵스타라는 주제에 최대한 맞춰서 구성했어요. 기술 시사만 세 번이나 하면서 음향이나 화질에도 더 신경 썼어요. 제작 과정에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제가 밀어붙였을 때 직원들이 열심히 협조를 해줘서 결과적으로 잘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 유튜브 쇼츠(shorts) 업로드, 인스타그램 계정 운영 등 브레드이발소 캐릭터를 활용한 다양한 콘텐츠 작업이 눈에 띕니다. <브레드이발소>의 마케팅 전략은 무엇인가요? 마케팅을 기획할 때 제 개인적인 취향은 배제하고 철저하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그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형태로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트렌드를 잘 따라가야 돼요. 제가 <브레드이발소> 쇼츠를 시작하자고 했을 때 내부에서 반대가 심했어요. 그런데 요즘 숏폼(short-form)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잖아요. 무조건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렇게 유튜브 계정에 쇼츠를 꾸준히 올리기 시작하니까 잘될 때는 구독자가 한 달에 20만 명씩 늘어나고 조회수는 2억 뷰까지 나오기도 했어요. 인스타그램도 마찬가지예요. 디자인팀 직원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저는 인스타그램을 활용한 홍보가 필요하다고 봤어요. 콘텐츠에 대한 고민을 제일 많이 하고 회사 내에서 경험치가 제일 많이 쌓인 사람은 저예요. 직원들의 생각은 경청해야 하지만 내부 의견이나 빅데이터는 언제나 참고용이에요. 참고 자료와 제 경험치, 비전을 가지고 종합적으로 최종 결정을 내리는 거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제가 져야죠. | <브레드이발소: 빵스타의 탄생> 작업을 마친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다음 세대를 육성하는 데 관심이 많아요. 그동안 기대주들이 나오지 않는 게 속상했는데 이번 작품을 기점으로 <브레드이발소>가 ‘정지환의 1인 독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작품에서 가장 반응이 좋았던 ‘탄빵보이즈’ 에피소드를 제가 2년 동안 키운 연출이 완성했어요. ‘패션모델 꾸미기’라는 에피소드도 우리 회사 연출팀 팀장이 직접 콘티를 그리고 시나리오를 수정하면서 만들었어요. 제가 감독급으로 키운 직원들이 7개의 에피소드 중에서 두 편이나 만들었다는 게 참 뿌듯해요. 결국 애니메이션 업계가 성장하려면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라이터(writer)나 디렉터(director)들이 많이 나와줘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브레드이발소> 스틸컷 | 감독님께서 ‘애니메이션 감독’을 꿈꾸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초등학생 때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소설가나 만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둘 다 어머님의 반대가 심해서 다른 장래 희망을 찾아봐야 했어요.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걸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여전히 제 마음속에는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직업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결국 부모님께 ‘애니메이션 감독’이라는 새로운 꿈을 말씀드렸어요. “나는 글 쓰는 거랑 그림 그리는 게 너무 재밌는데 만화가도 못 하게 하고 소설가도 못 하게 하니까 애니메이션 감독을 할래요.” 솔직히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애니메이션 감독은 소설가나 만화가보다 인식이 안 좋았어요. 아들이 애니메이션 감독을 하겠다고 하니까 집안 분위기가 장난 아니었죠. 그런데 제 느낌은 달랐어요. 애니메이션 감독을 하면 글도 쓸 수 있고 그림도 그릴 수 있고 영상 편집도 할 수 있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 할 수 있겠는데? 나한테는 최고의 직업이다.’ 싶었어요. 그때 한창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성기였거든요. 제 인생의 롤모델이 미야자키 하야오였어요. “나는 한국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될 거야. 진짜 멋진 애니메이션 만들 거야.”라고 말하고 다녔죠. | ‘애니메이션 감독’이라는 직업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애니메이션은 종합 예술이거든요. 애니메이션 감독은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영상 연출이랑 편집하고 음악도 다뤄요. 상업 예술이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서는 마케팅까지 해야 돼요. 어떻게 보면 모든 걸 종합적으로 해볼 기회예요. 예를 들어, 영화 감독님이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드물어요. 게임 만드는 분이 시나리오까지 쓰는 경우도 거의 없어요. 그런데 애니메이션은 다 할 수 있다는 거죠. 저는 저희 회사 직원들에게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해요. “네가 만약에 시나리오만 쓸 줄 알고 콘티만 그릴 수 있다면 절대 좋은 작품 못 만들어. 시나리오, 콘티, 디자인 능력치를 두루 갖춰야 좋은 작품 만들 수 있어.” 이런 이야기를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편이에요. 그만큼 애니메이션 감독은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고 또 많은 일을 해내야 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에요. | 감독님께서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궁극적으로 애니메이션을 통해 더 재미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요즘 세상에 수많은 콘텐츠가 나오고 있지만 저는 막상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켜면 볼 게 없다고 느끼거든요. 보던 것만 계속 보게 되더라고요. <브레드이발소>가 나오면 다양한 분들이 이걸 재미있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쇼츠 콘텐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브레드이발소> 쇼츠를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좋겠고 디저트나 빵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은 <브레드이발소>에서 그런 내용을 재미있게 받아들이셨으면 좋겠어요. <브레드이발소>를 통해 사람들에게 재미와 힐링을 주고 싶어요. 제가 만든 애니메이션을 보고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갈 동력을 얻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어떻게 보면 제가 윤활유 역할을 하고 싶은 거죠. | 마지막으로 <브레드이발소>를 사랑해 주시는 분들께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브레드이발소>를 보시는 분들은 힘든 일이 생겨도 계속 도전하면서 버티셨으면 좋겠어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당연히 힘든 일들이 생기겠죠. 하지만 세상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는 게 힘들고 일이 내 마음대로 진행되지 않는 게 정상이에요. 당연한 걸 두고 “나는 왜 인생이 안 풀리지” 이러면서 불평하면 안 돼요. 본인이 의지를 가지고 버티다 보면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이 높아진 시대라고 보거든요.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낙담하지 말고 뭐가 문제인지 되돌아보고 개선해서 다시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는 그 허들을 뛰어넘자는 마인드로 살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균웹진 이다윤 기자
『가방 들어주는 아이』와 『까칠한 재석이 시리즈』 등 다수의 대표작을 남긴 고정욱 작가는 성균관대학교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 후 동화 작가로 활발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소아마비로 인한 지체 장애를 갖고 있음에도 글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청소년과 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동화에는 단순한 이야기를 넘어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Q. 작가님께서 동화를 쓰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1992년도에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제 단편 소설이 당선됐습니다. 그 뒤로 작가로 활동을 시작했고 평생 소설가가 되어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셋 두었는데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저에게 물었습니다. “아빠는 왜 동화는 안 써요?” 이때 우리 아이들이 읽을 만한 동화를 한 편 쓰면 좋겠다 싶어서 제가 처음 고민한 작품이 『아주 특별한 우리 형』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쓸 때 어떤 동화를 쓰면 좋을까 참 많이 고민했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동화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렇다면 나만의 동화가 뭘까? 고민 끝에 내가 가장 잘 아는 걸 써야겠다고 생각해 ‘장애’라는 소재를 처음 들고 온 거죠. 작품의 주인공은 뇌병변 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흔히 뇌성마비라고 하죠. 그가 이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져 가는지에 대한 과정을 그렸어요. 차별과 편견도 있지만 그 안에 따듯함과 고마움도 더불어 있습니다. 이렇게 제가 제일 잘 아는 장애를 주제로 동화를 썼는데 그해 최고의 베스트 셀러가 됐어요. 이후로 출판사에서 다음 작품도 써주세요, 다음 작품도 써주세요 하다 보니 어느새 동화 작가의 타이틀을 걸게 되었네요. Q.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동화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가요? 동화의 매력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어른들이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거겠죠. 동화는 교육과 연결을 많이 짓습니다. 문제는 교훈이나 가르침이 대개는 딱딱하죠. ‘정직해야 한다’ ‘거짓말하지 마라’ ‘친구를 때리지 마라’ 등등. 근데 동화는 아이들이 지루해하는 잔소리에 껍데기를 씌웠어요. 동화도 따지고 보면 잔소리에요. 다만 스토리라는 껍데기를 씌워 아이들이 삼키기 좋게 만든 거죠. 우리 미래 세대를 책임질 어린이들에게 즐거운 방식으로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작가님께서 이것만큼은 꼭 전하고 싶은 교훈이 있을까요? 저로서는 그것이 바로 ‘장애’에 관한 거죠. ‘장애인은 나와 다르지 않다’ ‘장애인은 나의 친구다’ ‘장애인은 차별하면 안 된다’ ‘편견을 가지고 대하지 말자’ 이런 주제들을 그대로 접하면 딱딱하니까 그 안에 스토리를 만든 겁니다. 지금은 많아졌지만 『아주 특별한 우리 형』이 나오기 전까지는 장애인이 주인공인 작품이 문학계나 출판계에 거의 없었습니다. 성인 작품에도 많지 않았어요. 『아주 특별한 우리 형』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 주셔서 장애라는 요소도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구나 처음으로 알린 계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Q. 작가님에게 가장 의미있는 책 하나만 소개해 주세요. 『가방 들어주는 아이』를 꼽겠습니다. 많은 독자의 가슴을 울렸고 그래서 가장 많이 팔리기도 한 작품입니다(약 120만부). 4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큰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요. 장애를 가진 친구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가방을 들어준다는 의미는 꼭 가방뿐만 아니라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이해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제 삶의 대표작이자 오늘날의 저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작품입니다. Q. 장애인과 함께 나아가는 사회를 위해 장애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장애에 대한 인식이 바뀌려면 장애인을 다양한 개성과 능력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장애인은 아무것도 못 한다', '장애인은 사회복지로 나라의 예산을 갉아먹는다'는 고정관념이 아니라, 장애인은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다른 면에서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장애인은 사회의 잉여가 아니라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장애인이 일하는 직장을 보면 이직률이 낮고, 한곳에 오래 머물며 숙련공이 되는 경우가 많죠. 이는 장애인을 고용하는 기업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맡기고, 그들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사회에도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Q.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작품을 쓰셨는데 소재 고갈에 대한 걱정이 들었던 적은 없으셨나요? 지금까지 약 360여 권의 책을 썼는데 소재 고갈에 대한 걱정은 대학교 3학년 때 이후로 사라졌습니다. 그때 신문방송학과의 '신문 문장론'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기자 출신 오소백 교수님이 오셔서 강의를 하셨는데 그분은 항상 메모지를 갖고 다니며 생각이나 정보를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메모 수첩을 보여주며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항상 메모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그 말을 듣고 저는 스프링 달린 작은 수첩을 사서 그때부터 메모를 시작했습니다. 그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져 40년이 넘었고, 대학교 때 작성한 메모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수백 개의 메모 수첩에는 단상, 그림, 기억해야 할 것들, 그리고 작품 아이디어들이 가득합니다. 필요할 때 수첩을 뒤져보면 잊고 있던 아이디어들이 떠오르죠. 이 메모들이 쌓여 제 삶의 기록이 되었고, 소재가 고갈될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둘째는 제가 계속 새로운 사실과 사건을 경험하고 받아들이는 데 큰 거부감이 없기 때문에 쓰고 싶은 작품이 무궁무진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웃음) Q. 최근 신간 『점퍼』를 출간하셨습니다. 이번 작품은 평소 쓰시는 소설의 분위기와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는데 어떤 작품인지 소개해 주세요. 『점퍼』는 제가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타임 슬립 기법으로 역사 소재를 다룬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1928년 오산학교로 가게 되어 김소월, 백석, 이중섭 등 여러 인물과 만나 일제강점기를 헤쳐 나가는 작품입니다. 저는 리얼리즘 작가로서 판타지 요소를 이야기에 많이 넣지 않았어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넷플릭스나 웹툰을 통해 타임 슬립이나 초능력 같은 판타지 소재에 익숙해져 있더군요. 이러한 트렌드를 반영하여 제가 처음으로 타임 슬립을 다룬 작품을 쓰게 되었습니다. 동화의 본질은 결국 아이들이 재밌게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Q. 작품을 구상하실 때 창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가 궁금합니다. 세 가지를 꼽겠습니다. 재미, 교훈, 감동입니다. 재미는 아이들이 읽으려면 당연히 필요한 것이고 교훈도 위에 언급한 내용입니다. 많은 동화 작가님들이 재미와 교훈을 결합해 작품을 그립니다. 마지막 요소가 감동인데 가장 어려운 부분이에요. 가슴을 울리거나 설레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여겨지는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저 자신도 감동을 받을 만큼 스토리, 작품성, 전개 등 많은 요소를 고려해야 하죠. 이렇게 고민하며 글을 쓰지만 모든 작품이 성공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책은 실패하고 또 어떤 책은 성공하죠.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항상 성적이 좋은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Q. 아이들에게 동화는 어떤 힘을 지니고 있나요? 동화의 힘은 아이들이 아직 순수하고 맑은 어린 시절, 흰 도화지 같은 생각과 마음에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제 작품 속 주인공들이 힘든 일을 이겨내는 장면을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고 성장하면서 비슷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했지" 하고 떠올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좋은 작품을 많이 읽는 것은 성인이 되었을 때 큰 자양분이 됩니다. 저는 아이들이 힘들 때 불현듯 떠오르는 그런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고정욱 작가는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도 이와 비슷한 답을 주었다. 문학 작품에서 주인공이 겪은 삶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그 상황이 나에게 닥쳤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렇게 해결했는데, 나도 그럼 이렇게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겠죠. 문학에서 스토리가 주는 힘입니다. 소설은 인생의 수많은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죠. 우리가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나 연극, 전시회를 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성균관대학교 학우분들은 대학로 가까이에서 생활한다는 장점을 적극 활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Q. 대학생은 동화를 읽기에 너무 늦었을까요? 아니요. 동화를 읽는 데에 늦은 때란 없어요. 대학생도 얼마든지 동화를 읽을 수 있습니다. 동화는 동심을 담고 있는데, 동심은 인간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죠. 동심이 없는 사람들은 너무 삭막한 삶을 살게 되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대학생들이 동화를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취업 준비로 힘든 시기에, 동화는 짧은 시간 안에 읽을 수 있고, 어렵지 않아 리프레쉬 하고 힐링을 할 수 있어요. 요즘 직장인들 사이에서 그림책이 유행하기도 했죠. 글자는 몇 개 없지만, 그림책을 펼쳐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된다고 합니다. 동화를 읽는 데 나이는 상관없어요. 누구나 동화를 통해 동심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마지막으로 동화 작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백남준 시인의 말씀을 빌리겠습니다. 첫째, ‘매일 쓰고 많이 써라’. 꾸준히 글을 쓰는 습관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둘째, ‘자신이 쓴 글이나 작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싸게 팔아라’. 혼자만 자기 글을 읽으면 발전할 수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객관적인 평가를 받으세요. 특히 칭찬보다 보완할 점이나 조언을 새겨들으세요. 마지막으로 ‘파티에 자주 가라’. 작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선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합니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임을 알리세요. 자기 작품을 알리고 또 유명해질 기회가 생길 것입니다. 세 번째가 많은 작가님들이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에요. 작가는 글로써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에 익숙하지, 어디에 나가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죠. 사람들과의 만남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저 역시 많이 쓰고, 싸게 팔고, 사람 만나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어요. 이 인터뷰도 이러한 동기 중 하나입니다. 작지만 우리 두 사람의 파티니까요. 작가로 성공하려면 이 세 가지를 실천해 보세요. 마지막으로 성균관대학교 후배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항상 젊을 때는 위축되기 쉽고 자신의 실력이나 능력 외의 것들로 평가받는 세상에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묵묵히 나아간다면, 결국 자신만의 길을 찾아 반드시 성공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대학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대학이 여러분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우리 대학 김성기 교수는 1992년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방법을 인간에 적용한 최초 과학자 중 한 명이다. 폴 로터버(Paul Lauterbur) 미국 피츠버그대 석좌교수직을 지냈으나 대한민국 뇌과학 발전을 위해 귀국해 2013년 IBS에 합류했다. 이번 국제자기공명의과학회에서는 인간과 동물 연구를 통해 fMRI 신호의 기본적인 생리학적 기초를 이해하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골드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기초과학연구원(IBS) 뇌과학이미징연구단 단장이자 성균관대 글로벌바이오메디컬공학과 석좌교수 직을 맡고 있는 김성기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fMRI 김성기 교수는 화학자로 과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학부에서는 화학(경북대 응용화학과 76학번)을,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대학에서는 물리화학을 연구했다. “대학에서는 응용화학을 공부했어요. 돌이켜보니 제 연구 분야와 접점이 없는 전공이었네요. 하지만 그 당시에는 화학 분야에 관심이 있었어요. 미국에서 물리화학을 공부해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박사후연구원(Postdoctoral researcher) 생활도 화학과에서 했어요.” 핵자기공명기(NMR)를 이용해 기계의 작동 원리를 연구하던 그가 어느 날 자기공명영상(MRI) 연구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포닥(Post-Doc) 생활 후에 잡(Job)을 구하면서 MRI 연구를 시작했어요. 포닥으로 일할 때 미네소타대학 방사선과 카밀 우거빌 교수로부터 ‘기능성 MRI (fMRI)’ 연구 합류 제안을 받았거든요. 어떻게 보면 우연히 새로운 분야에 발을 내디딘 거죠. MRI 연구는 처음이었지만 화학과에서 사용하던 NMR과 MRI의 작동 원리가 같아서 큰 부담 없이 우거빌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우거빌 교수의 좋은 장비를 가지고 연구해 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어요.“ 우거빌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인 김성기 교수는 미네소타대학 NMR 연구센터에서 fMRI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fMRI 연구 1년 만에 ‘fMRI의 아버지’ 오가와 박사와 이 분야에서 쓴 첫 번째 논문을 발표한다. 김성기 교수는 이를 ‘fMRI를 사람에게 쓸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보인 논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MRI와 fMRI의 차이는 무엇일까? 김성기 교수가 정의하는 MRI와 fMRI의 차이점에 대해 들어봤다. “원리는 같지만 촬영법이 다르다. 뇌를 이해하려면 구조와 기능, 연결을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구조’는 MRI로 주로 찍는다. fMRI는 ‘기능’을 주로 연구한다. fMRI는 이름 앞에 ‘f’가 들어가 있는데 ‘f’는 ‘기능(functional)’이라는 영어 단어의 첫 글자다. 다시 말하면 MRI는 인체의 해부학적인 단면을 찍는다. 병원 의사들이 환자의 몸에 종양과 같은 질병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게 MRI다. 반면 fMRI는 뇌 연구자의 도구다. 뇌세포가 활성화되면 늘어난 에너지 소모를 충당하기 위해 피의 흐름이 증가한다. 그러면 핏속의 산소량이 증가하게 되고, 그 산소량의 증감을 이용해 fMRI는 영상을 얻는다. MRI는 카메라와 같이 정지 영상을 얻으며, fMRI는 동영상 촬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fMRI는 머리를 스캔하면서 빨리 반복해서 여러 번 찍어서 변화를 계산한다.” | 피츠버그대학 ‘폴 라터버 석좌교수’ 김성기 교수는 미네소타대학에서 11년을 일하고 2002년 피츠버그대학으로 소속을 옮겼다. 카밀 우거빌 교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의 연구 중심지를 마련한 셈이다. 피츠버그대학에서 그의 보직명은 폴 라터버(Paul Lauterbur) 석좌교수. 폴 라터버는 MRI를 발명한 공로로 2003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미국 화학자다. 라터버 교수는 피츠버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는데 피츠버그대학은 그걸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석좌교수 자리를 만들었다. 김성기 교수가 그 자리를 맡은 것이다. 피츠버그대학은 그에게 멋진 뇌이미징센터 건물을 지어주었다. 김 단장은 “내가 건물 두 개를 지었다. 피츠버그에서 실험실과 사무실을 어떻게 배치하면 좋을지를 직접 구상하고 설계했다. 그리고 그 도면을 한국에 갖고 와서 두 번째 건물을 지었는데 그게 성균관대 N센터 건물이다”라고 말했다. | 성균관대학교 뇌과학이미징연구단 피츠버그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멋진 건물과 함께 일하는 조교수 네 명이 있는 실험실, 풍족한 연구비 등 부족할 게 없었다. 그런데 2011년 성균관대 서민아 교수가 그를 찾아왔다. 서 교수는 “한국에 기초과학연구원(IBS)이 생기고 곧 연구단장 모집공고가 나온다. 성균관대가 IBS연구단을 유치하려고 한다. 그 연구단의 단장으로 지원해 달라. 연구단장에 선임되면 연구단 설립에 필요한 시설을 전적으로 지원하겠다”라고 말했다. 미국 피츠버그에서 달리 부러울 게 없는 연구생활이었으나, 한국의 뇌과학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김성기 교수는 귀국하기로 했다. 그는 2013년 IBS의 3차 연구단장 모집 때 연구단장으로 선정됐다. 성균관대는 김성기 교수가 이끌 IBS연구단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N센터라는 새로운 8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약 100억가량의 7T MRI를 김 단장 연구를 위해 사줬다. 김성기 교수는 “학교에 시설투자를 많이 요구했는데 학교에서 다 들어주겠다고 해서 놀랐다. 고가의 MRI를 사들인 건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성균관대의 IBS연구단에서 그는 동물과 사람을 같이 볼 수 있는 fMRI 플랫폼을 만들었다. 그는 fMRI를 갖고 미네소타대학에서는 사람을, 피츠버그대학에서는 동물인 고양이 실험을 주로 했으나, 한국에서는 생쥐 실험을 시작했다. 김성기 교수는 “사람과 동물을 같이 보는 플랫폼은 생각과 달리 같은 곳에 만들기 쉽지 않다. 국제적 경쟁력이 있는 시설을 갖추기가 어렵다. 우리 연구단처럼 한 건물에 동물과 사람을 같이 연구할 수 있는 곳이 흔치 않다.”고 이야기했다. N센터 지하에는 동물 실험 관련 특별한 공간이 있다. 동물과 사람을 같이 볼 수 있는 시설, 즉 종간(cross-species) 실험 시설인데 김성기 교수는 실험 시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성기 교수는 “동물 연구는 사람을 이해하는 게 큰 목적이다. 사람에서 이해가 안 되는 건 동물 실험으로 확인한다. 그걸 위해 MRI를 기본 플랫폼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IBS 뇌과학이미징연구단은 MRI라는 플랫폼을 개발하고, 다양한 분야의 교수들은 그 플랫폼을 이용해 자신의 주제를 연구한다. 그의 연구단에는 그 자신이 직접 이끄는 fMRI그룹 말고도, 신경혈류그룹 신경회로그룹, 인지신경맵핑그룹, 계산신경과학그룹 등이 있다.
판결문에는 사건의 기록이 담긴다. 그 중 <양형 이유>는 판사의 재량이 들어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성란이다. 이곳에 피고인의 회한, 피해자의 눈물, 판사의 고민과 흔적을 쓰는 판사가 있다. 그의 판결문은 법정에 모인 사람들을 위로하고, 함께 슬퍼하며 따듯이 안아준다. 사회가 나아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선고를 내리는 박주영 판사를 만나보자. 박주영 판사는 법학과 졸업 후 7년간 변호사로 근무했고 판사로 재직하여 현재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장을 지내고 있다. 형사재판과 소년재판 등 다양한 재판을 진행해 오며 그가 맡았던 사건을 이야기로 풀어내 『어떤 양형 이유』와 『법정의 얼굴들』을 집필했다. 2022년 <유퀴즈 온더 블록>에 출연했으며 책과 편지를 선물하는 판사로 유명하다. Q 판사님께서는 판결문 속 <양형 이유>에 피고와 피해자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는다고 하셨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쓰게 되셨나요? 처음으로 양형 이유를 파격적이고 강하게 쓴 사건은, 유퀴즈에서도 언급했고 책에도 있는 2014년 울산 현대중공업 산재 사건입니다. 이런 범죄로 드러난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비참한 현실을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커서, 쉽고 강하게 각인되는 참신한 표현을 쓰려고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기사의 제목으로 쓸 수 있거나 짧게 인용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강하게 각인될 문장을 구상했죠. 양형 이유 중 문학작품을 인용하거나 은유나 비유를 구사하는 부분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양형 이유의 대부분은 사건의 구체적 경위와 관련 범죄에 대한 통계 혹은 형사 정책 자료 등에 관한 것이죠. 제가 신경 써서 양형 이유를 써야겠다고 선별한 사건의 판결을 작성하는 데는 일반 판결보다 시간이 10배는 족히 더 걸립니다. 법원 내부는 물론 법무부와 검찰, 경찰, 형사정책연구원, 여성가족부 등 접근가능한 기관의 관련 자료는 가급적 찾아서 참고합니다. 여기에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이 부분 작성을 마치고, 판결의 맨 마지막에 문학작품 등을 인용하면서 하고 싶은 말을 감상적인 표현으로 썼죠. 그 이유는 딱딱한 사회적 원인 분석이나 법적 판단은 기자들이 관심을 잘 가지지 않고 일반 국민들에게 잘 가닿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였습니다. Q 양형 이유를 이렇게 쓰시는 것에 대한 내부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은 없었나요? 낯설고 불편해하는 시선들이 많았지만 무시해 버렸습니다. 양형의 이유는, 법적 판단과는 다소 무관한 영역이고, 판결이 개인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대중에 공개되고 일반의 규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공기(公器)이기도 하며, 판사가 대중과 소통하는 공식적이고 유일한 수단이 판결이므로, 이 부분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연방대법원 판례를 보면 문학작품을 인용하거나 문학적 표현이 담긴 판결이 실제 있고, 그런 판결들이 특히 많은 인사이트를 담고 있기도 한 점을 참고했습니다. ▲ 유퀴즈 출연 (디글 유튜브 썸네일) Q 판사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무엇인가요? <법정의 얼굴들>에 실었던, 마약을 끊었다며 제게 편지를 보낸 피고인과, 자살을 막아보려고 책과 차비까지 쥐어 준 자살방조미수 사건 피고인은 잊을 수가 없네요. 그 피고인의 동생이 유튜브 댓글로 잘 지낸다는 안부와 감사 인사를 남겨 정말 뭐라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 마약 피고인의 편지 <어떤 양형 이유>에 실었던, 시골 할머니 취득시효 소송, 5만 원 즉결 심판의 치매 할머니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친족 강간 사건에서 증인으로 나와 해맑게 웃던 둘째 딸, 소년재판을 할 때 소년원 대신 쉼터로 보내자 확 달라진 아이, 토지수용보상금 사건에서 변호사의 주장이 잘 와닿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벌떡 손을 들고 일어서서 ‘판사님 국가가 강돕니다’라고 한 사건도 기억납니다. 가장 인상적인 구두변론이었습니다. 말을 심하게 더듬는 추행범이 있었는데(야간의 목격자 진술이 문제가 되는 사안이었습니다), 증거가 다소 부족하여 무죄를 할까 고민하다 유죄로 하긴 했는데, 선고 시 그 피고인의 표정을 보고 무죄로 했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건도 기억에 남습니다. <법정의 얼굴들>에서 다룬 2013년 울산법원에서 공보관할 때 가까이서 보았던 ‘이서현 양 사건(울산계모사건)’과 제가 선고한 아동학대 사건은 잊히지 않습니다. 선고할 때 숨져 간 두 아이의 부검 사진과 현장 사진이 떠올라 목이 메어 정말 힘들었죠. 또 어머니를 43회 찔러 살해한 조현병을 앓던 젊은 피고인 사건도 잊을 수 없고요. 최근에는 눈썹 문신 시술을 무죄로 판단한 사건, 작년 연말 노숙인에게 책과 돈을 준 사건, 올 1월 전세사기 사건에서 최고형(15년)을 선고하고 피해 청년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 사건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외에도 셀 수 없는 사건들이 떠오릅니다. Q 법조인은 반복되는 힘든 사건을 보며 아프지만 조금씩 무뎌지는 감정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법이 냉정하고 딱딱하게 규정되어 있고, 모든 사건의 결론이 실제 그렇게 선고되고 집행된다 하더라도, 판단하는 사람은 매번 아파하고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존재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앞에 서는 재판의 대상들이 매번 새롭게 아파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를 유지하는 데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태해지고 느슨해지는 것은 사람의 피할 수 없는 속성이므로 항상 자신을 경계하고 정신 차리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만으로 스스로 환기하고 긴장상태를 유지하기는 어렵죠. 그건 불가능할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아요. 힘든 사건을 처리하면서 매번 사건에 깊이 몰입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면 몸에서 못 견디겠다고 신호를 보내죠. 저 또한 판사 생활 도중 몸에 큰 탈이 온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몰입할 때는 몰입하고, 빠져나올 때는 빠져나와야 합니다. 좋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이유가 여기 있죠. 현실적으로 모든 사건에 몰입할 수도 없어요. 사건이 너무 많기 때문이죠. 판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에 치이며 살고 있지 않나요. 그렇지만 일에 매몰되어 기계적으로 일처리를 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비록 모든 사건에 전력을 다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 사건만큼은 그냥 흘려보내면 안되겠다라는 강한 확신이 들 때에는 저는 전력을 다해 몸을 던집니다. 이렇게 아낌없이 시간과 정성을 쏟아 부은 사건들이 100건으로 치면 5건 정도밖에 안 돼요. 결국 나머지 95건은 관성적으로 처리되죠. 제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기도 하고 또 그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기도 합니다. 대신 제가 선별한 5건만큼은 저를 완전히 던져 넣습니다. 30분이면 쓸 판결을 30일을 쓰는 식이죠. 그렇게 처리했던 사건들이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키고 사람들한테 공감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공감과 행동의 연대에 대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세상의 부조리한 모든 일에 대해 항상 공감하고 아파할 수는 없어요.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부서집니다. 100건의 사건 중 누군가 자신의 능력에 맞게 5건을 처리했다면, 나머지 95건은 다른 사람들이 서너 건씩 나누어 맡아 주는 것, 이게 바로 연대입니다. 연대는 우리가 같이 세상을 밀고 있는데 누가 힘들어서 잠시 쉴 때 다른 사람이 맡아 그 자리를 밀어주고, 세상이 후진하지 않게 붙잡아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Q 법관으로 근무하면서 책을 쓰는 것이 큰 도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시작했고 어디서 책을 집필하시는 편인가요? <어떤 양형 이유>는 법률신문 칼럼이 계기가 되어 쓰게 된 책입니다. 평소 글 쓰는 걸 좋아하고 책도 내고 싶었지만, 퇴직 이후 하려고 생각했기에 처음 출간 제안이 왔을 때 많이 망설였습니다. 물론 그전에 책을 쓴 판사들도 있었지만, 현직 판사가 외부에 재판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낸다는 것이 여전히 큰 부담이었죠. 책이 나왔을 때 외부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무척 두려웠습니다. 만약 구설에 오르거나 문제가 생기면 사표도 쓸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많은 분들께서 좋게 봐주셔서 무척 감사한 마음입니다. 현직에 있으면서 위험부담을 안고 글을 쓰려고 한 제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형사재판 현장에 있으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이나 부조리,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너무 잘 보여요. 그럼에도 법정 외부에서는 이런 점을 알기 어렵죠. 판사는 이미 벌어진 사건을 맡을 뿐 상황 자체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런 점이 무척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혹한 범죄의 실태와 원인, 사회적 관심과 법이나 제도 개선이 얼마나 절실한지에 대해 널리 알리고 싶어 판결을 상세히 썼습니다. 그러나 판결로 아무리 열심히 떠들어도 뉴스로 잘 다뤄주지 않을 뿐 아니라, 기껏 언급되어도 짧은 단신으로 금방 소비되어 버리더군요. 그래서 책을 쓰기로 다짐했습니다. 집에서는 거의 글을 쓰지 않습니다. 집중도 되지 않고 주말 빼고는 집에 있는 시간도 많지 않아 대부분 사무실에서 업무 외 시간을 이용해서 씁니다. <어떤 양형 이유>는 재판을 하는 도중 틈틈이 썼기 때문에 주로 사무실에서 썼고, <법정의 얼굴들>은 절반 정도는 사무실에서 쓰고, 절반은 휴직 도중 아파트 독서실에서 썼습니다. Q 판사님 책의 곳곳에서 섬세한 문학적 표현에 눈물을 훔치는 독자가 많습니다. 판사님이 글을 쓸 때 가지는 자세가 있을까요? 글을 쓰고 나아가 책을 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평소 관찰하고 기록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일기든, 메모든 꼭 기록해야 합니다. 글을 쓰는 동기 또한 중요합니다. 저는 공적인 목적 외에도 개인적으로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제 아이들을 아끼고 가족을 사랑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재판에 임했고,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았는지 같은, 제 삶의 모습을 사람들 특히 가족들에게 남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썼습니다. 이 동기가 더 강했습니다. 제가 책에서 쓴 독특한 은유나 비유 등은 평소 독서나 영화를 보면서 그때그때 메모해 둔 문구에서 가져오기도 하고, 사건에 맞게 지어내서 쓰기도 합니다. 예컨대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는 문장은 제가 너무 아내 말을 안 들었던 것을 반성하면서 오래전에 써 두었던 일기의 한 구절입니다. (웃음) Q 법조인의 길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저는 큰 소명감이나 사명감으로 시작하진 않았습니다. 솔직히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자존심도 상하고 어떻게든 출세해 보려고 적성을 포기하고 법학과로 진학했습니다. 사실 사법시험은 바로 될 줄 알았는데, 사법시험 1차에서 여러 번 떨어졌습니다. 치기 어리지만, 전 그냥 제 능력만 보여주고 사법연수원에서 자퇴하려 했습니다. 자퇴 이후에 전업 작가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글 쓰는 일을 하며 살려 했죠. 그러나 가족을 부양하고 결혼을 하면서 운명적으로 법조계에 남았습니다. 법대도 우연히 갔고, 사법고시도 남들이 한다고 해서 엉겁결에 따라 했습니다. 한 방에 인생 역전할 수 있는 기회기도 했고요. 그러나 계속 1차에서 떨어져 이 길이 아닌가 보다 생각했죠. 그래서 마지막에는, 더 이상 미련 두지 않으려고 제일기획이나 LG애드 같은 광고회사 지원서를 대봉투에 넣어 둔 상태에서, 불합격만 확인하고 바로 우체통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1차에 1개도 안 남기고 커트라인으로 붙었습니다. 그때 떨어졌으면, 당시에는 그래도 취업이 쉬울 때라 십중팔구 광고회사를 갔을 것이고, 그랬다면 아마 하이트 맥주나 소나타 자동차, 소니 카메라 광고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객관식 문제 1개로 제 인생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면, 참 운명이란 게 있구나 싶습니다. 변호사 시절은 그야말로 호구지책이라 처음 법대를 가며 꿈꿨던 약자 보호나 정의 실현, 이런 거창한 가치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법원에 와서야 비로소 이런 문제들로 고민하기 시작했죠. 저는 많은 사건을 통해 완성된 법률가로 숙련되어 가는 점과 더불어, 약자 보호나 정의 같은 가치를 깊이 고민해 볼 수 있다는 점이 판사의 가장 큰 장점이라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변호사들은 현실적인 문제에 매몰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저는 처음부터 이 길이다 하고 오지는 않았지만, 법조계에 있으면서 뒤늦게 소명의식이나 직업의식이 생긴 편입니다. 많은 사건을 처리하면서 사회의 부조리나 사회적 약자에 시선이 많이 갔죠. Q 학창 시절 판사님은 어떤 학생이었나요? 대구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는데 뭐 특별히 튀지 않고 조용하고 평범했습니다. 내성적 성격이고 선친이 책을 좋아하셔서 어릴 때부터 책은 많이 읽었습니다. 삼국지 20권짜리를 초등학교 때 한 3번은 읽은 것 같습니다. 한국 문학과 세계문학 전집도 열심히 읽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문예부 활동을 열심히 했죠. 백일장이나 공모전 등에서 상도 제법 받았습니다. 고2 겨울 무렵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성적은 곤두박질치고 대학 가기 힘들겠더군요. 그래서 우선 써클 활동을 깨끗이 접고 입시 준비만 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 장학금을 많이 주는 성대(4년 장학금에 숙소와 생활비 지원) 법학과로 지원했습니다. 대학 때도 문예반(행소문학회)에 들어갔는데 당시 상황상 문학보다 이념 교육이 많아 금방 탈퇴했죠. 대학 생활을 돌이켜보면 1~2학년 때는 당시 제가 87학번이다 보니 시위에 많이 참여했습니다. 87년 민주항쟁 이후 88년에는 학내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었는데, 그 무렵 당시 재단(봉명 그룹)이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재단 장학금을 받기로 하고 들어갔던 터라 장학금에 떨어졌고, 89년에 바로 군대를 갔던 기억이 나네요. (웃음) 이후에는 지금도 있는 것으로 아는 양현관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했습니다. 고되고 힘들었지만 많은 추억도 함께 쌓았습니다. 돌이켜 보니 다사다난한 대학 생활이었네요. Q ‘법정의 얼굴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환대’라고 생각합니다. 판사님에게 ‘환대’란 무엇인가요? 환대는, 같은 인간을 존엄하게 인정하는 행동 방식이며, 타인과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서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자 필수 조건입니다. 범죄와 전쟁, 학살 모두 적대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판사의 입장에서 환대란, 타인을 비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1년 6개월 정도 소년부 판사로 일했는데, 당시 소년범 아이들을 보며 세상이 너무도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따듯한 사람이 아니고 무조건 선처해 주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타인과 동등한 조건에 있어보지 못한 이들을, 타인과 동등한 잣대를 가지고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듯한 밥을 먹고 사랑을 받아본 경험, 주변의 배려를 받고 일상이 주는 안온함을 누려본 경험이 있음에도, 그 모든 호의를 배신했을 때, 비로소 그를 비난할 수 있는 것이죠. 처음부터 보호받을 울타리 자체가 없었던 사람에게, 울타리를 넘고 부수었다고 비난하고 벌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 이 아이들은 태어나서 살던 그대로 살아온 것뿐인데 말이죠. Q 앞으로 판사 혹은 작가로서 계획이나 목표가 궁금합니다. 판사로서의 삶이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직에 있는 동안은 사회적으로 의미 있고 선례로서의 가치 있는 판결이나 법리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그 이후 삶은 참 예측하기 어려운데, 후배를 가르치든, 변호사를 하든, 아니면 어떤 분(문유석 작가)처럼 글만 써서 먹고살든(정말 부러운데 아마 힘들 것 같고), 제가 하는 일 중 적어도 30퍼센트 이상은 개인적 이익이 아니라, 공적 이익과 타인을 위한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글을 계속 쓸 생각입니다. 첫 책인 <어떤 양형 이유>를 쓰고 사실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했고, 전업 작가가 아니라서 더 책 낼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어느덧 세 권을 썼습니다. 밖에서도 글을 계속 쓰는 사람으로 인정해 주더군요. 저도 이제 작가라는 정체성이 생겼고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경험과 지식을 살려 사회에 도움이 되는 저술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법정 소설은 꼭 써 보고 싶습니다. ▲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전경 Q 마지막으로 법조인의 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무엇보다 좋은 루틴을 만들 것을 권합니다. 달리기든, 금연이든, 무언가 중장기적으로 이루어 내려면 루틴이 있어야 합니다. 저 역시 이게 없어서 일생이 고생입니다. 루틴을 못 만드는 게 루틴이 되었습니다. 이루는 것 없이 항상 제자리입니다. 그렇게 몇 번 되돌아오다 보니 인생이 금방 갔습니다. 저는 좋은 루틴이 좋은 사람을 만든다고 확신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정세랑 작가의 말 중에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는 말이 있습니다. 법조인은 누구보다 이 말을 실감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개인적으로 법조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조리하고 엉망인 세상과 사람을 만나더라도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만큼은 잘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균웹진 이준표 기자
예술가는 한 시대의 본질을 탐구하는 관찰자이자 창조자에 비유되곤 한다. 이들은 사회를 관찰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작품을 만들어낸다. 이들의 작업은 대중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그들의 인식을 확장하는 데에서 나아가 때로는 개인이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기도 한다. 작품을 통해 대중에게 동시대 사회 현실을 인식시키고 긍정적인 방향의 사회 변화를 이끄는 미술 작가 신제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만나서 반갑습니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미술 작가 신제현입니다. 현재 공공미술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어요. 우리 학교 미술학과와 미술 대학원을 졸업했고 지금은 성균관대학교 미술학과 교수직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별마당 도서관 중심부에 공개된 그의 조형예술 작품 <렛미인(Let Me In> 신제현 작가의 작품 <렛미인>은 10개의 문 너머에 있는 새로운 만남과 행운에 대한 기대감을 전한다. 책을 펼치면 책 속 이야기로 빨려 들어가듯 10개의 문이 열리면서 장애 예술가 10인의 작품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렛미인>은 다양한 세상과의 만남과 교류를 표현해 만남의 장이라는 별마당 도서관의 역할과 잘 어우러진다는 평을 얻었다. | 올해 스타필드 코엑스몰 별마당 도서관이 개관 7주년을 맞아 개최한 ‘제6회 열린 아트 공모전’에서 <렛미인(Let Me In)>이 대상작으로 선정됐어요. 이 작품이 탄생하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하 장문원)이 있어요. 장문원은 장애인 문화예술 정책을 개발하고 제안하는 정책기관이에요. 장문원에서 운영하는 사업 중에 ‘이음 예술창작 아카데미’라는 사업이 있는데요. 대학교와 협력해 예술교육 과정을 운영하면서 장애 예술가들의 창작 역량을 강화하고 장애 예술의 기반을 확대하는 프로그램이에요. 제가 작년에 성균관대학교에서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장애 예술가들을 만났어요. 단기 프로젝트였지만 수업이 잘 마무리되면서 올해는 학교에서 장애 예술가들의 다원예술캡스톤디자인 수업을 맡았어요. 수강생들과의 워크숍을 통해 결과물을 전시하기도 했고요. 이음 아카데미와 다원예술캡스톤디자인 수업에 참여한 장애 예술가들과의 협업으로 <렛미인>이라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어요. | <렛미인>은 장애 예술가와의 협업을 통해 도시에서 배제된 집단을 조망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작품의 기획 의도는 무엇인가요? 우리나라가 유독 장애 예술가에 대한 평가가 낮아요. 편견에서 벗어나서 바라보면 작품성이 높은 것들이 많은데도 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죠. 그런 인식을 개선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스타필드라는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잖아요. 그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우리 장애 예술가들이 만든 작품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작품을 보면 감탄이 나오고 이들의 작품세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거든요. 작품 자체는 동명의 영화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이 영화에는 등장인물들이 문 앞에서 ‘렛미인’을 외쳐야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설정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장애 예술가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마치 ‘렛미인’이라는 허가가 없으면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이러한 사회적 현실이 드러나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 별마당 도서관에서 <렛미인>을 감상하는 관객들이 끊임없이 문을 여는 모습이 눈에 띄었어요. 철학적인 아이디어를 예술 작품으로 어떻게 구현하고자 했는지 궁금합니다. 장애 예술가들이 그린 그림을 영상으로 만들었고 관객들이 문을 열면 이 영상을 볼 수 있도록 설계했어요. 그런데 문이 40초마다 열렸다가 닫히기를 반복해요. 관객들이 문을 열고 차분하게 영상을 보려고 하면 문이 닫혀버리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할 때쯤 문이 다시 열리고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한 문은 닫힙니다. 관객들이 이러한 불편함을 경험하게끔 만들어서 ‘렛미인’이라는 허가, 즉 문을 직접 여는 귀찮은 행위를 하지 않고서는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현실을 표현했어요. 신제현 작가의 작업은 우리 사회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경험한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한다. 특히 젠트리피케이션과 도시 문제 관련 활동에서 그의 작업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신제현 작가는 2009년부터 다양한 퍼포먼스와 영상, 악기 제작 워크숍 등을 통해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에 예술적 논리로 저항해 왔다. 그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쫓겨난 가게에서 버려진 물건들로 악기를 만들고 연주하는 퍼포먼스 <한남스타일>로 화제를 모았고 2016년에는 서울의 복합문화공간 테이크아웃드로잉과 프랑스의 젠트리피케이션 지역 갤러리 이그렉에서 위치 센서를 이용해 두 공간을 연결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작업 활동은 예술 작가가 법적 문제에 절묘하게 개입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예술을 가교 삼아 동시대 사회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그의 행보는 사뭇 대단하게 느껴진다. | 그동안 선보인 작업의 주제를 살펴보면,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신제현 작가의 지속적인 관심이 드러납니다. 예술과 사회 운동을 병행하면서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나요? 예술이 사회 운동으로 넘어갈 때 종종 생기는 문제가 있어요. 미학적인 가치가 사회 운동의 효율성에 묻혀서 이게 사회 운동인지 예술 활동인지 구분이 안 되고 양쪽 다 흐지부지되는 거예요. 꽤 많은 액티비스트들이 미술관에 들어가기에는 예술적 의미가 부족하고 사회 활동으로 보기에는 활동이 미비한 딜레마 상황을 겪어요. 저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사회 운동과 예술 활동을 분리하려고 해요. 사회 운동을 할 때는 사회 운동에 전념하고 예술을 할 때는 사회 운동을 하면서 얻은 경험이나 느낌을 작품화하는 거죠. 사회 운동을 직접적으로 가져오는 게 아니라 사회 운동을 하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철학적인 부분을 예술의 실마리로 활용하는 거예요. | 현대 예술과 사회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에도 둘의 성격을 분리하려고 한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예술과 사회 운동의 역할 구분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술과 사회 운동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어요. 그렇지만 사회적인 이슈에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술이 신선한 방식으로 사고의 전환을 일으키고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예술가가 사회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언론인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거든요. 언론만의 영역이 있는 한편 예술은 일반 기자들이 다루지 못하는 영역을 다뤄야 해요. 예술가의 목표는 대중에게 예술적 논리로 사회적인 이슈를 각인시키고 더 나은 방향으로 사회를 바꾸는 거니까요.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오해나 대상화의 문제가 일어나서는 안 되겠죠. 어떤 경우라도 사회 운동을 하는 예술가가 사회 운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특혜를 받거나 사회적 약자의 안타까운 처지를 이용해서 개인의 이득을 취해서는 안 돼요. 그런 상황이 생기는 순간 예술가에게 선한 의지로서의 목적성은 완전히 상실된다고 봐요. 저는 이러한 부분을 조심하려고 하는 편이고요. | 사회적인 이슈를 주제로 예술 작품을 기획할 때는 타자(他者)로서 문제 당사자의 일상에 얼마나 개입하는 게 적절할지 가늠하는 감각도 필요해 보입니다. 신제현 작가는 예술적 개입의 정도(程度)를 어떻게 결정하는지 궁금해요. 제가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제 명예나 이득을 얻는 데 대상화되지 않도록 노력해요. 과거에 젠트리피케이션이나 환경 보호와 관련된 활동을 할 때도 사회 운동의 일부분을 작업에 직접적으로 끌어오지 않으려고 했어요. 제가 하는 활동을 SNS에 홍보하거나 주변 지인들에게 알리는 일도 하지 않았죠. 작업물에 사회 문제의 당사자들이 불편함을 느낄 만한 부분이 있지는 않은지 고민을 많이 해요. 고민되는 지점이 있다면 불편함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도 마련하고요. 예를 들어, 다큐멘터리 영상을 찍을 때는 해당 주제의 당사자를 출연시키는 게 자극적이고 화제성이 높겠지만 저는 전문 배우를 쓰려고 해요. 당사자를 대상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더욱 예술적인 형식을 활용해서 작품을 만들고 싶거든요. <물의 모양(The Shape of water)>, 2021, 40년 된 집에서 나온 나무들 Wood from an abandoned house, 7일간의 퍼포먼스 다양한 사회적 담론을 주도하는 작가 신제현의 작품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재는 ‘버림받아 사라져가는 것’이다. 대표적인 작업으로는 2021년 11월 한강을 무대로 펼쳐진 다원 예술 퍼포먼스 <물의 모양>이 있다. 40년 된 주택을 작업실로 리모델링하던 신제현 작가는 버려지는 목재에 주목했다. 리모델링 과정에서 나온 나무와 물건으로 배를 만들다가 새로운 프로젝트 <물의 모양>이 시작된 것이다. 관람객들은 작가가 만든 배를 타고 한강을 돌아다니며 강에 떠 있는 무대장치를 만난다. 피아노와 가야금, 드럼 등의 무대장치는 작가가 투자한 코인의 등락 폭에 의해 자동으로 움직인다. 피아노가 뗏목 위에서 강을 떠다니며 자동으로 연주되는 광경은 관람객들에게 생경함을 선사한다. | 버려진 물건들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는 <시간의 소리>, 10년 후면 사라지는 데이터를 자개 기법으로 표현한 <윤슬> 등 신제현 작가의 작품은 사라져가는 사물을 예술로 승화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사라져가는 존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제 작품 세계의 공통 주제는 시간 철학이에요. 모든 작업이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하려는 시도였어요. 그동안 예술계에서는 영원불멸한 진리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 강했어요. 그림도 한 번 완성되면 그 상태로 유지되고 조각도 완성되면 거기에서 끝나는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동시대 미술이라고 불리는 현대미술로 넘어오면서 모든 건 시간의 흐름에 의해 변하고 바뀐다는 철학적 사고가 대세예요. 저도 자연스럽게 멈춰 있고 굳어진 무언가보다는 끊임없이 사라지고 변하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 개념적인 담론이 중시되는 동시대 미술의 패러다임 속에서 ‘사라져가는 존재’는 매력적인 소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제현 작가가 ‘사라져가는 존재’를 통해 대중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도시 문명이 발달하면서 세속적인 프레임 안에서 영혼 불멸한 안정성 혹은 황금 같은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사실 그런 생각들이 인간을 더 외롭고 우울하게 만들잖아요. 모든 건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세상에 영원한 건 없으니까요. ‘이걸 인식하는 순간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텐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큰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사라지는 것들을 작품화하고 무언가 사라지는 것도 결국 변화의 일부라는 걸 인정하면서 소멸을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제 작품을 관람하는 관람객들과 이러한 지점을 공유하고 싶어요. 신제현 작가는 실험적인 성격의 동시대 미술 작업을 기획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작품에 담고자 하는 메시지는 개념적 이해가 필요하고 작업의 구조 역시 복잡하다. 그의 대담한 기획 의도는 치열한 탐구 과정을 거쳐서야 우리에게 다가온다. 신제현 작가는 분명 쉽지 않은 작품을 선보인다. 하지만 그는 미술 작가로서 미술을 대중화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관람객을 대상으로 한 미술 강의나 워크숍, 정부 기관 협력 사업 등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전시 장소의 성격에 따라 관람객들이 작품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장치를 준비하기도 한다. 작품을 보자마자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흥미와 작품의 개념, 구조를 파악해야만 느낄 수 있는 흥미, 이 둘의 균형을 맞추려는 그의 세심함이 눈에 띈다. | 음악, 연극, 영화 등 문화예술 활동에 대한 현대인의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미술은 유독 진입장벽이 높다고 여겨집니다. 미술관 방문에 막연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나요? 미술 초보자라면 국가에서 운영하는 미술관부터 가는 게 좋아요.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 아르코 미술관 같은 곳이요. 국공립 미술관은 시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간이기 때문에 대중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전시를 기획해요. 작품에 대한 설명도 친절하게 제공하고요. 그런데 대안공간이나 상업 갤러리부터 방문하면 현대 미술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어요. 거긴 일반 대중이 아니라 미술 전문가를 위한 공간이거든요.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면 모두를 위한 미술관에 방문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세요. | 미술관 방문 경험을 쌓은 뒤 미술 공부에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싶다면 어떤 경험을 하는 게 좋을까요? 미술에 흥미가 생겼다면 미술관에서 도슨트 설명을 들으면서 조금 더 복잡하고 어려운 미술을 경험해 보세요. 미술관에서 운영하는 강좌도 듣고 현대 미술을 공부한 다음에 난도가 높은 대안 공간에 가면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극한의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예술 작품 감상을 통해 얻는 쾌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어요. 현대 미술은 표현에 제한이 없거든요.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깊이와 파격, 자유로움을 느껴보세요. 거기까지 가는 일련의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무겁지 않은 전시부터 시작해서 취향을 맞춰간다면 미술에 재미를 붙일 수 있을 겁니다. _ “그냥 파도에 쓸려가듯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거예요. 파도가 높아지면 무서워하고 파도가 낮아지면 낮아지는 대로 안정을 취하면서요. 여기에서 조금 더 재미있고 창의적인 일상을 보내려고 노력하면서 사는 게 행복에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우리 학교 학우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묻는 말에 그는 이런 대답을 내놓았다. 동시대 사회 현실을 관찰하고 관성화된 일상에서 예술 작업 형식의 개입을 골몰하는 ‘미술 작가 신제현’다운 답변이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각자 주체성을 가지고 현재를 살아간다. 신제현 작가의 말처럼, 견고하고 안정된,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형태의 미래를 꿈꾸며 살아가기보다는 하루하루의 일상에 집중해 보는 게 어떨까.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극한의 쾌감을 선물하는 ‘미술’과 함께 말이다.
아동∙청소년 건강은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제 우리는 사회적 차원에서 어떤 요인이 아이들의 건강에 영향을 주는지 살펴야 한다. 아동·청소년학과 이태경 교수는 한국 청소년들의 약물 사용 패턴과 그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규명하여 미국 국립보건원 (NIH) 산하 국립 약물남용 연구소 (NIDA)가 수여하는 ‘International Poster Session Travel Award’를 수상했다. 사회적, 그리고 가정적 환경이 어떻게 청소년들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지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Q. 만나서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성균관대학교 아동·청소년학과 아동∙청소년 심리 및 발달 전공 조교수 이태경입니다. 한국과 미국에서 아동∙청소년 발달 심리와 인간 발달로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미국 마이애미 의과 대학 공중보건학과 (Public Health Sciences, University of Miami Miller School of Medicine)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습니다. 2022년에 성균관대학교로 부임해 “청소년 심리 및 건강 발달과 관련 방법론” 관련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Q. NIDA ‘International Poster Session Travel Award'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수상하신 연구 주제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 수상한 연구는 한국 아동 청소년 패널 자료를 사용해 한국 청소년들의 약물 사용 (음주 및 흡연)의 종단적 변화 패턴을 살펴보고, 이러한 약물 사용 패턴과 관련된 위험 요인 및 예방할 수 있는 요인들을 규명한 연구입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청소년의 약물 사용 변화 패턴은 지역사회 위험성에 영향을 받게 되는 점을 규명했습니다. 즉,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가 위험하다고 응답한 청소년들은 그렇지 않은 청소년들보다 약물 사용을 더욱 일찍 시작했습니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약물 사용 패턴은 부모의 양육 행동에 의해서도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을 함께 규명했습니다. 아동기에 부모의 방임 및 학대를 경험한 청소년들은 그렇지 않은 청소년들보다 약물 사용을 더욱 일찍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오랜 시간 동안 약물 사용 경험을 보고했습니다. 흥미로운 결과는, 지역사회가 위험하다고 응답한 청소년 중 일부는 부모로부터 긍정적인 양육 경험을 보고했는데, 이들은 비록 약물 사용을 일찍 시작했지만, 이후 약물 사용을 중단할 가능성이 그렇지 않은 청소년들보다 더욱 높았다는 점입니다. 본 연구의 결과는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사회적 위험을 경험한 청소년들에게 가족 기능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가족 중재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약물 사용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수행하고 계신 미국 마이애미 대학 교수님들, 그리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있는 지도 대학원생과 함께 한국 청소년들의 약물 사용에 관한 국제 공동 연구가 수상까지 연결되어 개인적으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Q. ‘아동청소년 심리 발달’ 및 ‘청소년 정신건강’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교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연구 분야는 무엇인가요? 저는 사회적 취약계층(저소득층, 다문화가정) 아동 및 청소년들의 정신 및 신체 건강 문제 발달 기제를 규명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 수업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스트레스가 신체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력을 규명하는 연구에 관심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스트레스 경험들 (예, 경제적 어려움, 부모의 학대 및 방임, 혹은 다문화 가정 청소년들의 문화 적응 문제)이 아동∙청소년들의 정신 건강 및 관련 문제 행동들 (비만 관련 행동, 약물 사용, 외현화 문제행동)에 미치는 단기적∙장기적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스트레스 과정 규명을 확장하여, 스트레스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보호 요인들을 규명하고 나아가 중재 프로그램 적용 및 효과성을 검증하는 연구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아동학, 가족학, 교육학, 그리고 의학 영역의 국내외 연구자들과 함께 다양한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발달 연구를 위해 다양한 분석 방법을 적용하는 것에도 관심이 있어 방법론에 관한 연구도 함께 진행 중입니다. Q. 지금까지 진행하셨던 연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연구가 있으신가요? 제가 참여한 모든 연구가 각자 에피소드가 있어 모두 기억에 남습니다. 그중 박사 과정 때 주도한 청소년 일반 정신병리(General Psychopathology)의 종단적 변화에 관한 연구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그 당시 수강했던 사회 역학 (Social Epidemiology) 수업을 통해 다양한 정신 건강 문제들은 서로 관련성이 있으며, 이는 정신 병리 구조로 규명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청소년 우울증에 대한 연구를 막 시작했던 터라 개인적으로 정신 건강 문제에 관심이 많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수업 시간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정신 병리 구조라는 주제가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지도 교수님 (Dr. Wickrama, K.A.S. University of Georgia)께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한 연구로 진행해 보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고, 교수님께서도 흥미로운 연구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격려와 함께 진행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후 몇 차례 추가 미팅을 통해 아이디어 수정을 거쳐, 청소년의 정신 병리 구조 규명에 관한 종단적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청소년 시기의 우울증세, 불안, 적개심은 일반정신병리 (General Psychopathology)라는 고차원 구조 (Higher-order structure)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일반 정신 병리는 청소년들이 속해 있는 맥락에 따라 다르게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구 결과는 정리하여 국제 정서 장애 학회 공식 저널인 Journal of Affective Disorder에 발표했습니다. 이후 일반 병리 구조의 타당성을 규명하기 위해 중년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도 진행했으며, 연구 결과는 미국 심리학회 건강 심리 분과 공식 학술지인 Health Psychology에 게재되었습니다. 일반정신병리 구조를 규명하기 위해 방법론적으로도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차례 보완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교수님께서 대부분 알려주시기도 했고, 도서관에서 오래된 원서도 찾아보고, 필요한 책들은 별도로 구입해 공부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 시기 방법론에 대한 지식이 가장 많이 늘었던 것 같습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수확은 이러한 노력들을 좋게 봐주셔서 의도치 않게 또 다른 공동 연구 기회로 이어지게 됩니다.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Iowa State university) 심리 통계 전공 교수님이신 Dr. Frederick Lorenz, 그리고 조지아 대학교 (University of Georgia) 인간발달학과 Dr. Catherine Walker O’Neal 교수님과 공동 작업을 통해 통계적 방법들이 실제 데이터에 어떻게 적용해야 되는지에 대해 많은 통찰과 배움이 있었습니다. 이는 이후 방법론 책을 공동 집필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사실은 연구는 무엇보다 본인이 재미있어야 하고, 협력도 아주 중요하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해서 도전하고 시도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때 형성된 소중한 학문적 네트워크들은 현재까지 이어져 여전히 그분들과 함께 국제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Q. 연구자로서 교수님의 연구 분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신 분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동 청소년 심리 및 건강 발달 분야로 꾸준히 연구하기까지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우선,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연구자가 갖추어야 할 태도를 몸소 실천함으로서 연구의 중요성을 알려주신 국내외 지도 교수님들 덕분입니다. 이분들을 통해 아동.청소년 심리 및 건강 발달에 대한 연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분들의 세심한 지도 덕분에 청소년들의 건강 행동들에 대해서 이해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학문이 어떻게 실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또한 국내외 동료 교수님들, 그리고 연구자분들께도 감사한 마음을 표합니다. 연구가 막힐 때마다 매번 새로운 아이디어와 함께 격려도 잊지 않으십니다. 이분들의 협업이 없었다면 현재 스트레스 및 중재 관련 연구들은 결코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지도 학생들에게도 감사를 표합니다. 학생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 끊임없는 도전, 그리고 성실성을 볼 때마다 항상 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연구 주제로 지속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아낌없는 지원과 지지를 보내주신 부모님과 가족에게도 감사함을 표합니다. 이분들의 도움으로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제가 받은 만큼 저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Q.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연구자로서 교수자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습니다. 연구자로서는 제 전공인 청소년기 건강 발달에 대한 연구를 보다 심도 있게 해보고 싶습니다. 제 연구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생애과정 관점 (Life course perspective)에 따르면, 한 개인의 역동적 발달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오랜 시간(long-view) 관찰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건강 발달에 관련된 전 생애 연구를 진행해 보고 싶은 목표가 있습니다. 교수자의 목표는 연구자로 이룬 성과를 통해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이 세계 수준의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우리 성균관대학교 학생들도 한국의 건강 격차 문제 해소를 넘어서 글로벌 건강 문제 해결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국내외 세계적 수준의 연구자들과 함께 건강 발달 연구를 진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수준의 후학 양성을 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Q. 마지막으로 성균관대학교 학우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성균관대학교 학생들 개개인이 유일무이한 유니크한 존재가 되었으면 합니다. 남들이 정해 놓은 목표를 무작정 따라하기 보다는 자신이 앞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때론 그 목표가 남들이 보기엔 무모할 수도 있고, 실현하기까지 어려움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진정 원한다면, 남들 눈을 의식하지 말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정과 끈기를 가지고 도전해 나가는 성균관대 학생이 되길 바랍니다. 성균웹진 이준표 기자
데이터는 숫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가 데이터를 조직화하여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데이터는 세상을 바꾸는 도구로서 가치가 생긴다. 데이터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 식품・외식 데이터 솔루션 기업 ‘포스페이스랩 (forSPACElab)’ 창업자 최지호(시스템경영공학 01), 승영욱(경영 05)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최지호 안녕하세요. 포스페이스랩 CPO 최지호입니다. 승영욱 안녕하세요. 포스페이스랩 대표이사 승영욱입니다. | 창업 이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최지호 저는 대학교에서 시스템경영공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 진학해서 산업공학 연구를 이어갔어요. 제가 대학원을 졸업할 즈음 LG가 애플의 아이폰에 대항하기 위해서 ‘UX 연구소’라는 연구 조직을 만들었어요. 마침 제 전공이 ‘HCI’라고 UX랑 연결되는 분야였거든요. LG전자 UX 연구소에 입사해서 4~5년 뒤에 출시할 제품 컨셉을 잡고 사용자 반응을 수집하는 일을 했죠. UX 연구소를 5년 정도 다녔고 LG전자 사내벤처기업에서도 2년 가까이 일을 해보니까 조금 더 민첩한 조직에서 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드웨어를 만드는 회사들은 프로세스가 느리거든요. 그래서 네이버로 이직해서 웨일 브라우저를 만들었어요. 기획부터 브랜딩, 브라우저 출시, 2.0 버전 업데이트까지 4년 정도 리뷰를 하니까 제품이 거의 완성되더라고요. 업무가 약간 지루해지던 차에 우연히 승영욱 님을 만났어요. [승영욱 대표이사(사진왼쪽) 최지호 CPO] 승영욱 저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롯데그룹 유통사업본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사업총괄팀에서 보고서를 만들고 편의점 채널 데이터 분석하는 일을 6년 정도 하다가 ‘바로고’라는 스타트업으로 이직했어요. 바로고에서는 자금 유치, 전략 총괄 등의 CSO(Chief Strategy Officer) 업무를 맡았어요. 당시에 20명 남짓이었던 회사 직원이 150명 규모가 될 때까지 회사를 키워보는 경험을 했죠. 그러다가 회사를 나와서 최지호 님과 창업했어요. * HCI (Human Computer Interaction) : 인간과 컴퓨터 간의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 | 포스페이스랩 공동 창업은 어떻게 이루어진 건가요? 최지호 사실 저는 승영욱 님을 만나기 전까지 외식업계나 배달 산업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잖아요. 내가 주문한 음식이 우리 집 앞에 오기까지 그 중간에 무언가 기업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죠. 그런데 승영욱 님을 통해 배달 산업을 처음 접했고 승영욱 님이 바로고에서 함께 일하던 분들과 창업을 논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식업을 창업 아이템으로 삼게 됐어요. 승영욱 시대가 변하면서 외식업계에도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일어났어요. 특히 배달 주문 접수 쪽은 배달의 민족이 IT화를 시켰어요. 주문이 매장으로 넘어가서 배달 회사가 고객에게 서비스를 전달하기까지 뒷부분의 과정이 되게 복잡하지만 여기도 바로고 같은 회사들을 통해 IT화가 이루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개별 사업자와 프랜차이즈 본사 간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은 아직 IT화가 진행되지 않았어요. ‘이 지점에서 뭐라도 할 게 많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 회사 동료들 그리고 최지호 님과 창업을 진행했죠. *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Digital Transformation) : 기업이 디지털 역량을 활용해 외부 환경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추진하는 프로세스 | 창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느낀 점이 있나요? 최지호 저희가 창업을 준비하던 시기에 우리나라에 스타트업 붐이 불었어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창업하겠다고 이야기하고 다녔죠. 그런데 실제로 창업을 한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저희 팀이 창업할 수 있었던 건 승영욱 대표님이 먼저 회사를 그만두고 법인을 세웠기 때문이에요. 누군가 한 명이 나서서 일을 추진해야 창업을 할 수 있어요. 다들 몸을 사리면 일이 진행되지 않거든요. 승영욱 님이 구심점 역할을 해주셔서 팀원들도 일을 저지를 수 있었어요. 승영욱 사업을 오래 하려면 개인의 능력보다는 그룹의 힘이 훨씬 중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그룹으로서 잘해야 기업이 성장할 수 있으니까요. 이 회사에서 제 역할은 좋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세팅하는 거예요. 더 좋은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조직 문화를 만드는 게 앞으로의 미션이 될 것 같아요. 하나 더 이야기하고 싶은 건 좋은 투자자를 데려오는 일이 좋은 멤버들을 구성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거예요. 우리 회사 2대 주주이기도 한 웹케시 그룹 석창규 회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어요. 회장님께서 저희 회사를 좋게 봐주시고 투자와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거든요. 덕분에 회사 성장에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 포스페이스랩은 어떤 회사인가요? 최지호 저희는 외식업 본사들이 사용하는 데이터 솔루션을 만들고 있어요. 옛날에는 프랜차이즈 매장이 전국에 500개가 있다고 치면 500개의 매장이 같은 포스를 썼어요. 본사가 각 매장의 데이터를 다 받아서 볼 수 있었죠. 그런데 최근에는 주문이 들어가는 채널이 다양해졌어요. 배달 업체도 한두 개가 아니에요. 데이터가 파편화되었는데 문제는 본사에서 이 데이터들을 합쳐서 볼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러면 기업 경영이 어려워져요. 그래서 저희가 중간에 흩어져 있는 데이터를 모아서 본사가 데이터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솔루션을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 기업의 방향성을 ‘식품・외식 데이터 솔루션’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최지호 우리나라가 OECD 회원국 중에서 자영업자 비율이 높은 편에 속해요. 그리고 자영업자의 상당수가 프랜차이즈에 가맹하죠. 프랜차이즈 본사는 데이터를 분석해서 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연구하고 IP 개발에 주력해야 해요. 그런데 포스사들이 프랜차이즈 본사에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으면서 프랜차이즈 본사는 데이터를 모으는 일에 인력을 낭비하게 됐어요. 문제는 기업이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면서 브랜드가 죽으면 피해는 자영업자 사장님들이 받는다는 거예요. 승영욱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예전에는 배달의 민족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매장 직원이 직접 포스기로 주소지를 입력하고 라이더를 호출해야 했어요. 제가 바로고에서 일할 때 포스사들과의 API 연동을 통해서 이 번거로움을 해결하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했어요. 그런데 포스사와 컨택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웠던 건 포스기에 들어있는 데이터가 고객사 소유가 아니라는 점이었어요. 외식업계의 데이터가 끊겨 있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죠. 실제로 데이터를 관리해야 하는 프랜차이즈 본사에 데이터 소유권이 없다는 게 이상하잖아요. 이걸 해결한다면 시장 전체의 문제도 풀리고 우리가 만든 프로덕트도 성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두 분이 회사에서 맡은 일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최지호 저는 프로덕트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요. 보통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메모장이나 메신저 같은 틀을 갖추고 있어요. 그런데 저희한테는 데이터 자체가 상품이거든요. 틀을 갖춘 데이터 퓨어라는 상품도 있지만 이건 껍데기고 실제 고객들이 사용하는 상품은 이 안에 있는 데이터예요. 저는 껍데기와 데이터를 책임지는 일을 하고 있어요. 승영욱 저는 대표직을 맡고 있어요. 대표이사로서 의사 결정을 내리는 일이 많아요. 그리고 저희가 직원 대부분이 엔지니어 그룹으로 구성된 개발 회사이다 보니 사내에 문과 출신 직원이 4명뿐이에요. 4명의 직원이 영업부터 전략, 재무, 회계, PR, IR, 인사 등의 업무를 다 해야 하므로 이러한 업무들을 진두지휘하는 역할도 하고 있어요. * IR (Investor Relations) : 기업이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홍보 활동 | 두 분이 생각하는 서로의 장점을 이야기해 주세요. 최지호 제가 생각하는 승영욱 님의 장점은 만나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거예요. 제 주변 사람들의 인맥 스펙트럼과는 차원이 달라요. 나이나 분야를 초월한 네트워크가 구축되어 있어서 회사를 운영하는 데도 큰 도움이 돼요. 승영욱 님의 포용력이 넓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승영욱 최지호 님은 신뢰도가 높은 스타일이죠. 사내 디자이너 그룹, 개발 그룹 등 파트를 가리지 않고 커뮤니케이션이 좋은 편이에요. 뛰어난 레퍼런스를 가지고 있고 소통 능력도 받쳐주기 때문에 많은 직원들이 최지호 님을 신뢰하고 있다고 느껴요. | 포스페이스랩은 직원을 채용할 때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궁금합니다. 최지호 저희가 기대하는 만큼의 전문성이 있는지가 제일 중요해요. 개인의 경력이나 자체적인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하죠. 그리고 유연하게 일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캐릭터여야 해요. 저희가 디렉션을 주는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맡은 파트에서 직접 디테일을 찾아가면서 일을 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완벽한 프로덕트라는 게 없는 산업이에요. 프로덕트의 정의는 우리끼리 만들어 가야 해요. 그래서 내부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스스로 일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필요해요. 승영욱 ‘너는 이것만 해라’ 식의 틀이 싫은 분들, 팀워크를 통해 조화롭게 퍼포먼스를 내보고 싶은 분들이 우리 회사랑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 직원 채용 과정에서 지원자들의 능력은 어떻게 확인하시나요? 최지호 저희같이 작은 회사에서는 대기업만큼 디테일하게 HR을 진행하기가 어려워요. 지원자들에게 인턴 기회를 주거나 직접 업무를 시켜보는 경우가 많아요. 지원자들과 대화도 많이 하죠. 면접 시간에만 이야기를 나누고 끝내는 게 아니라 그 전에 지원자들과 같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면서 그 사람에 대한 데이터를 쌓아요. 승영욱 신규 직원을 채용할 때는 그 파트에서 일하는 직원들이랑 이야기해 볼 기회도 주면서 같이 일할 사람들의 의견도 많이 들어보는 편이에요. * HR (Human Resources) : 인적 자원 관리 | 회사를 경영하는 리더로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최지호 회사가 망하지 않고 모두가 성공의 경험을 가져갈 수 있도록 만드는 거죠. 지금 여기에 있는 직원들이 이 회사를 평생 다니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 회사가 거쳐 가는 곳이라면 여기에서 일하면서 배운 것들이 그다음 단계에 도움이 되어야 하잖아요. 이 팀에서 만든 프로덕트가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업계에서 듣고 평생의 레퍼런스로 가져갈 만한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게 모두에게 가장 행복한 일이지 않을까 싶어요. 승영욱 어떻게 조직 전체의 퍼포먼스를 극대화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저희 같은 소프트웨어 회사는 사람이 많아진다고 더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없다고 잘 안되는 것도 아니거든요. 관계를 이렇게 저렇게 엮어서 시너지를 만드는 게 핵심이에요. | 하나의 그룹을 이끄는 리더에게 중요한 건 무엇인가요? 최지호 리더에게 중요한 건 구성원들에게 욕 먹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인 것 같아요. 리더가 어떤 결정을 하면 그 선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구성원도 있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구성원도 있겠죠. 리더가 아닌 일반 구성원은 다른 구성원들에게 욕 먹지 않기 위한 결정을 할 수도 있는데 리더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흔들리지 않고 필요한 결정을 해나가야 해요. 그리고 구성원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듣더라도 그것들을 모두 해명할 수 없어요. 그냥 지나가는 거죠. 리더는 그걸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승영욱 리더는 강한 확신이 있어야 해요. 생각해 보면 지금 하려는 일들이 잘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커요. 왜냐하면 저희는 남들이 한 번도 만들어보지 않은 걸 만들고 있거든요. 누가 이렇게 하면 된다고 확신하겠어요? 애초에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영역인 거예요. ‘이거 이렇게 해서 안 될 수가 없다’는 강한 자기 확신이 없으면 99%의 안 될 가능성을 이겨내는 건 쉽지 않아요. | 창업을 꿈꾸는 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으신가요? 최지호 제가 창업의 길에 들어서면서 느낀 점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 사회에서 기업이라는 조직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그 나라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최근에 금융권 기업들의 채용 과정에서 발생한 성차별 사건이 이슈가 됐어요. 기업이 그런 일을 하면 사회 전체가 악영향을 받아요. 사업체의 의사결정이 가지는 무게감이 느껴지죠. 회사를 운영하다 보면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순간들이 계속 생겨요. 그때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가 상당히 중요해요. 회사에 도움이 되면서 이 사회에도 기여하는 방향의 의사결정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승영욱 나의 실패가 모두의 실패가 되는 무게감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창업해야 해요. 개인 장사를 할 사람과 기업을 만드는 사람이 가져야 할 고민의 깊이는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창업을 하게 되면 책임져야 할 구성원들이 생기기 때문에 신중하게 고민해 보고 결정하셨으면 좋겠어요. 창업을 결심하셨다면 최대한 다양한 학교 선배들, 창업가들을 만나보고 피드백을 들어보면서 시작하는 게 도움이 될 거예요. | 마지막으로 성균웹진 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최지호 이렇게 변화가 많은 세상에서 중심이 되는 게 무엇인지 묻는다면 답은 여전히 독서라고 생각해요. 저는 학부생 때 도서관에서 살았거든요. 그때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서 고민하고 느꼈던 것들이 제가 지금 하는 일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대학생 때 다양한 책을 읽어둔 덕분에 제가 사회에서 조금 더 유연하게 행동할 수 있었어요. 사고의 유연성을 만들어주는 건 독서밖에 없는 것 같아요. 승영욱 우리 학교 김경환 교수님과의 일화가 생각나요.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비즈니스 광고 사업에 관심이 있었어요. 골프와 관련된 광고 상품을 하나 만들었는데 특허를 낼 수 있는지가 궁금해졌어요. 당시에 전공 교과목을 가르쳐주시던 김경환 교수님을 찾아갔죠. 김경환 교수님이 제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그 자리에서 학교 변리사를 불러주시더라고요. 덕분에 제가 특허 출원도 하고 대학생 발명 공모전에 나가서 1등도 했어요. 내가 무언가 만들 수 있고 그게 세상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어요. 이 경험이 제가 창업을 결심하는 데도 많은 영향을 줬어요. 그 이후로 위닝 멘탈리티가 생겼거든요. 대학교에 다니면서도, 대기업에 취업하고 나서도 항상 창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어요. 여러분도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활동들을 많이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조그마한 거라도 자기가 직접 만들어보고 타인의 피드백을 듣고 무언가를 완성하는 경험은 소중해요. 나의 재능을 찾는 경험을 최대한 많이 시도하면서 다양한 기회에 대응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기술고시는 5급 공개채용선발시험 과학기술직을 부르는 호칭으로 행정부 소속 5급 공무원을 선발하기 위해 치르는 시험이다. 과학기술 직군은 전산직, 공업직, 방송통신직 등 일반적으로 이공계열 학생들이 전공 지식을 바탕으로 시험을 치르며 선발 인원이 적기 때문에 합격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김지욱 국장은 정보공학과(현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기술고시 합격 후 조달청에서 물품 및 서비스 구매, 전자조달 및 조달품질관리 등 주요 업무를 두루 거친 조달정책 전문가다. 공직 생활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오랫동안 공직에 몸담은 그를 모셨다. Q. 공무원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신 계기와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처음부터 공무원을 해야겠다고 다짐한건 아니었습니다. 복학 후 정보공학과에서 공부하면서 프로그램 개발보다는 다른 쪽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코딩이 저랑 맞지 않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군 제대 직전 같은 학과 선배님들로부터 기술고시에 대해 듣게 되었고, 공대를 나와 정부에서 일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공부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기술직의 경우 일반행정직보다 인원을 적게 뽑아서 불확실성이 컸어요.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잘 모르지만, 당시에는 1차 객관식으로 영어와 한국사 그리고 전공과목 두 개를 봤었고 2차는 전공 4과목으로 주관식 시험을 봤습니다. 시험 첫 도전에 1, 2차를 합격하여 수험 공부를 빨리 끝마칠 수 있겠다는 기대와 달리 3차에서 떨어지면서 쓰디쓴 아픔을 맛봤습니다. 이후 4년 차에 학교 졸업과 동시에 최종 합격하며 고시원 생활을 마칠 수 있었죠. 돌이켜 생각해 보면 첫 도전에 바로 합격했다면 많이 자만하며 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오히려 그때의 실패가 이후 공직 생활을 더욱 열심히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Q. 기술고시에 합격하면 어떤 업무나 프로젝트를 맡게 되나요? 기술직이든 일반행정직이든 들어오게 되면 업무에서 뚜렷하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본인 직렬을 살려서 관련된 업무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특허청, 병무청, 산림청, 행정안전부 등 모든 정부부처는 기본적으로 전산직이 필요해서 인원을 뽑지만, 이들이 항상 정보화 부서에만 있을 수 없어요. 그런 부처도 있다고 들었지만 대체로 다양한 부서를 돌아야지만 국민이 원하는 행정서비스를 알고 지원할 수 있습니다. 본인 업무에 대한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어서 한 곳에만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전산직으로 들어오면 조달청은 전자조달기획과나 전자조달관리과 등 정보화 부서에 조금 더 머무르기는 하지만 결국 관리직 공무원의 소양은 다양한 부서의 일을 파악하는 것이라 다른 부서도 가게 됩니다. 정보화 부서에서는 정보시스템 운영과 기획, 정보화사업 수행 등의 업무를 수행합니다. Q. 공직 생활을 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거나 공유하고 싶은 경험이 있을까요? 사무관 시절에 국가종합전자조달시스템인 ‘나라장터’ 시스템 구축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경험이 기억에 남습니다. 나라장터는 사용자가 입찰공고, 업체등록, 계약 체결, 대금 지급 등 모든 조달 과정을 온라인에서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는 국가종합전자조달시스템입니다. 이러한 복잡한 시스템을 설계할 때 여러 가지 기능을 구현하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작업들이 많습니다. 직접 프로그래밍을 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기관과 협업하고 연계하면서 이해관계자들과 어떻게 업무가 수행되어야 하는지 파악하고 기획 관리했습니다. 새벽 3~4시까지 회의도 하고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한국의 전자정부를 대표하는 사이트를 만드는 데에 기여할 수 있어서 보람차고 뿌듯했습니다. 이 나라장터를 팀원들과 함께 구축하였던 것이 뜻깊은 기억으로 남습니다. 이 밖에도 주시카고총영사관에 주재관으로 나갔을 때 외교부 소속으로 우리나라 대통령의 국빈방문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일이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공무원이라고 해서 항상 똑같은 업무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은 다른 부처로 발령받아 다양한 업무를 맡아서 하기도 합니다. Q. 공직 시작했을 때와 현재 하시는 업무 고시를 보고 처음 공직에 들어서면 5급 사무관으로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는 주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시안을 완성하는 작업을 맡습니다. 실무자로서 여러 업무를 수행해내죠. 과장을 달고 나서는 과의 업무를 총괄합니다. 회의를 주재하고, 각 과에서 돌아가는 일들을 조율하는 것, 과의 발전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주 업무입니다. 국장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지휘하고 기획하는 역할이 과에서 국으로 늘어난 것뿐이죠. 각 과에서 올라오는 안건을 보고받고 회의를 진행하며 다른 사업국 혹은 다른 청이나 부처와 협의하는 일이 잦습니다. 그래서 출장도 많이 다녀야 하지요. 국장으로서 필요한 소양은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바람직한 방향으로 결정을 내려주는 것입니다. 책임을 지고 큰 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직원들이 바라는 관리자의 모습입니다. 실무자로서 일하는 것보다 오히려 힘들 때도 있습니다.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래에서 잘 해결하지만 위로 올라오는 문서는 대부분 쟁점 사안이나 고민해 봐야 할 안건을 가지고 옵니다. 같이 머리를 싸매고 결단을 내릴 줄 아는 리더여야만 아래 사람들이 믿고 따를 수 있습니다. 대전정부청사 전경 (출처: 정부청사관리본부) Q. 공직 생활을 오래 하신 국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공무원 생활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공무원의 장점으로 워라벨은 흔히들 꼽고 단점으로 반복적인 업무를 이야기합니다. 저는 어떤 공직에서 근무하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사실이 아니라고 전합니다. 연차 초반에는 일이 물밀듯이 들어와서 워라벨을 지키며 일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연차가 쌓일수록 여유가 생기고 월급이 오르는 것이죠. 안정적인 것과 편안하다는 다릅니다. 공무원이 되려면 멘탈도 강해야 해요. 감내해야 하는 어려운 부분도 많습니다. 안정적인 것만을 추구해서 공무원이 되겠다고 한다면 말리고 싶네요. 단점으로 꼽은 매일 반복되는 업무도 사실이 아닙니다. 공무원이 항상 똑같은 업무를 본다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여러 부서를 돌며 여러 업무를 배우고 생소한 부서에도 몸담아보고 연차가 쌓인 후에는 일을 기획하고 관리하면서 다양한 업무를 소화해 냅니다. 대국민서비스가 향상되고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보며 보람과 뿌듯함을 느낀다면 공직 생활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물론 법으로 제한되는 것도 많고 보고해야 하는 것도 있어 완전히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일을 하는 데에는 힘들지만 제도의 틀 내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얘기해 드리고 싶습니다. 추가로 공무원이 되어서도 유학을 갈 수 있고 공관이나 국제기구에서도 일해보며 다양한 업무 경험을 쌓을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런 부분도 공무원으로서 누릴 수 있는 큰 혜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조달청에 들어왔을 때 외교부 주재관으로 근무할 일이 생길 줄은 몰랐네요. (웃음) Q. 앞으로의 목표나 비전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아직도 조달행정 업무에서 개선의 여지가 남아있는 곳들이 많습니다. 조달청에 몸 담고 있는 시간까지는 초심을 잃지 않고 조달 행정이 더욱 나아질 수 있도록 일하고 싶습니다. 어떤 업무든 상관없이, 어디를 가든, 어느 부서를 가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Q. 마지막으로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하려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길은 다양합니다. 앞으로 장래에 뭘 할지 깊이 고민해 보십시요. 고시라는 게 합격하면 좋지만 되기까지의 과정이 녹록하지 않다는 거 너무나 잘 압니다. 열매는 달지만 합격의 길이 쉽지 않을 수 있어요. 앞으로 장래에 이 일을 잘할 수 있을지 아닌지 충분히 고민해 보고 들어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나 공무원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정말 공무원이 되고 싶다면 사명감과 책임감을 느끼고 일한다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대에 무슨 사명감과 책임감이냐 하실 수 있지만 그런 친구들이 공직에서 국민을 위해 일하고 힘써야 한다고 믿어요. 수년을 공부해 공무원이 됐는데 적은 월급을 보고 실망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월급이 적은 것도 사실이고 워라벨도 장담하기 힘들죠. 고생해서 들어왔는데 환상과 다를 수 있어요. 공공 업무에 자긍심과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초반의 고생을 이겨내고 관리직 공무원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다른 길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러니까 20대의 3~4년을 쏟을 가치가 있는지, 내가 공무원이 되어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바꾸어 나가고 싶은지 충분히 고민한 후 시험 준비를 시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파이팅입니다. 성균웹진 이준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