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화단의 재조명: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
- 565호
- 기사입력 2025.06.10
- 취재 김연후 기자
- 편집 임진서 기자
- 조회수 2839
“산다는 것은 살기를 그친다는 것, 그것은 상상의 해결책이다.
우리의 삶은 다른 곳에 있다"
| 비주류의 예술사, 초현실주의
바다는 멀리서 보면 일직선의 흔들림 없는 수평선이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예측할 수 없는 파도의 포말들이 이리저리 얽히며 바다를 뒤흔든다. 작은 포말들이 광활한 바다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바다의 전부를 이루는 것처럼 일직선의 역사에서 배제되었던 비주류는 결국 역사의 모든 근간을 이룬다.
초현실주의는 이러한 비주류의 예술사로서 20세기 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 영향을 받아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이성주의적, 백인 중심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유지되는 서유럽의 가치를 비판한다. 나아가 세계대전이라는 참극을 만든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의문을 던지며 현실을 뛰어넘어 삶에 대한 사유를 남긴다.
▲ 임응식, <정물2>, 1949, 출처=국립현대미술관
초현실주의가 한국 미술계에 처음 들어온 것은 일제의 탄압을 직면한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였다. 초현실주의가 지향했던 전통을 벗어난 저항, 혁명, 부조화와 같은 가치는 일제의 억압으로 드러낼 수 없었지만, 1930년대 말 일본의 재야 미술 단체에서 활동하던 유학생들에 의해 비로소 빛을 볼 수 있었다.
초현실주의는 단순히 추상적인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동안의 현실을 성찰할 기회를 갖다준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 미술계 내에서 일종의 시대착오로 여겨져 주연으로서 조명된 적은 없지만 '산다는 것은 살기를 그친다는 것, 그것은 상상의 해결책이다. 삶은 다른 곳에 있다'는 초현실주의 선언(1924) 마지막 문장을 실현한 작품들에서 그 역사적 잔상을 살펴볼 수 있다.
| 한국 화단을 재조명하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의 특별전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은 한국 미술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작가를 재조명함으로써 초현실주의적 사유와 탐구를 촉구한다. 더하여 근대 미술가의 재발견 두 번째 시리즈로서 김욱규, 김종남, 김종하, 신영헌, 김영환, 박광호 등 여섯 작가를 중심으로 초현실주의적 작품을 소개한다.
▶ 출처=국립현대미술관
김욱규(1911-1990) 작가는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광복 이후 함흥 미술연구소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4 후퇴 때 가족을 남겨둔 채 월남한 김욱규는 생계를 위해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했으나 그가 남긴 400여 점의 작품 대부분엔 제목과 제작 연도, 서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에게 보여주거나 판매를 위해 그렸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과 단절한 채 남긴 그림은 김욱규가 평생 안고 살아갔던 이데올로기적 대치와 그로 인한 가족과의 이산의 고통을 표현할 유일한 창구였을 것이다.
▲ 김욱규, <제목없음>, 1970년대, 출처=국립현대미술관
김욱규는 1970년대부터 창작에 몰두하며 자연 속 기이한 생명체, 그로테스크한 묘사 등 자신의 트라우마와 불안을 초현실적 심상을 통해 표현했다. 김욱규에게 있어 예술은 모순 그 자체다. 현실과 맞닿아있을 때 그림은 그저 생계의 수단이지만, 현실과 단절된 채 그리는 작품은 상실을 메워 주는 하나의 목적인 것이다. 이러한 김욱규의 처절한 감정은 그의 작품에 그대로 녹아 들어있다.
김종남(1914-1986) 작가는 경남 산청 출신으로 일본 미술학교 졸업 후 태평양 전쟁 때 항공 정비부대에 동원되었다. 광복 이후 1950년에 마나베 집안의 양자가 되어 성을 바꾸고,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그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로부터 가족과 자신을 지키고자 임종 직전에서야 두 아들에게 자신이 한국인임을 밝혔다.
▲ 김종남(마나베 히데오), <수변>, 1941, 출처=국립현대미술관
김종남의 그림은 유구하게 숲, 식물, 동물, 곤충이 주요 대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대상은 기괴하리만치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눅눅해 보이는 숲은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1950년대 이후 그의 작품을 보면 곤충과 동물이 보호색을 띠어 거대한 숲에 숨어 있거나 식물과 인간 등 두 생명체가 결합한 그림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마나베 히데오라는 가면을 쓴 채 일본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한국인 김종남의 내면적 불안을 보여준다. 김욱규와 마찬가지로 김종남에게도 초현실주의는 실재적 삶에서 오는 불안과 상실을 표현할 목적이 되어준 것이다.
| 우리의 삶은 다른 곳에 있다
초현실주의는 말 그대로 현실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말한다. 흔히 초현실주의라 하면 삶과 현실에서 지극히 동떨어진 공상적인 무언가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일제 탄압부터 민족 분단까지의 역사 속에서 폭력과 고통 없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초현실이었던 사람들에게 초현실주의는 삶의 근원적 불안과 이데올로기적 억압을 표현하고 그들의 진정한 현실을 드러낼 수 있었던 길이었을지 모른다. 현실을 초월함으로써 더 적나라하게 현실을 성찰할 수 있다는 것, 초현실주의가 갖는 모순은 배제되었던 이들의 예술이자 문학이 되어주었다. 이러한 비주류 예술가들의 초현실주의 창작을 재조명하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특별전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은 7월 6일까지 진행 예정이다. 올여름,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했던 예술가들의 작품을 주목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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