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이란 무엇인가?–
실존주의적 사조와 <신화의 단애>

  • 469호
  • 기사입력 2021.06.12
  • 취재 박기성 기자
  • 편집 김민서 기자

몇 년 전 대한민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라는 노래를 아는가? 중독성 있고 신나는 멜로디로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제목의 ‘Amor Fati’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깊게 생각해 본 사람은 많이 없다. 이번 학술에서는 ‘아모르 파티’의 의미와 그에 담긴 ‘실존주의적’ 사조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다.


먼저 실존주의라는 말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실존주의란 20세기 문학, 철학 분야에서 등장한 하나의 사조다. 실존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의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적 철학을 가진 인물로 분류된 사상가, 철학자들 모두 각자 다른 성향을 가진다. 그저 ‘실존’이라는 문제에 대한 담론을 제기한 이유로 ‘실존주의’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일 뿐이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어떠한 사유나 철학에 보편적인 의미나 관념을 부여하고 규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신이나 절대자에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정서와 행동을 탐구한다. 이러한 견해에 입각한다면 ‘실존주의는 무엇이다’라는 구조의 모든 명제와 문장 역시 비 실존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실존주의는 정의하기 어려운 철학적 사조이지만 본질보다는 존재를 우선시하는 견해이다. 즉, 존재의 의미를 규정하기 보다는 존재 그 자체에 중점을 두는 사상이다. 다음으로는 실존주의에 대해 언급한 철학자들의 담론을 둘러보자.


실존주의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철학자는 장 폴 사르트르이다. 실존주의에 대한 사르트르의 생각은 ‘실존은 반드시 본질에 앞선다.’라는 그의 말로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다. 펜의 본질은 무언가 쓰는 데 있고, 옷은 입는 데 있다. 그러나 인간은 펜과 옷과 달리 주어진 역할이나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탄생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펜이나 옷과는 달리, 태어날 때 부여된 역할이 없으므로 성장하면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가야 하는 존재다. 이렇게 ‘실존’이란 인간의 자유와 자유의지, 그로부터 비롯되는 무한한 가능성들을 뜻한다. 그리고 실존은 인간으로 하여금 항상 고민하고 불안에 휩싸이게 만드는 동시에 무언가로부터 구속되지 않은 독립된 인간의 개별성, 자율성을 추구한다. 이와 같은 실존에 대한 사르트르의 견해는 사르트르 자신의 생애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1964년 자신에게 수여된 노벨문학상을 거부했다. 사르트르는 이외에도 수많은 상들을 거부했고 ‘살아있는 동안 그 누구도 평가받을 자격이 없다.’라는 말을 남기며 본질과 정의를 규정함으로써 한계를 두는 모든 행위를 부정한 바 있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견해를 반박하고 나선 카뮈, 그리고 카뮈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니체의 사유에 대해 알아보겠다. 실존주의에 대한 니체의 이해를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은 이 글의 앞부분에서도 제시된 ‘아모르 파티’이다. 라틴어로 운명에의 사랑, ‘운명애’라는 의미인 아모르 파티는 자칫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말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니체는 인간에게 주어진 삶은 무한한 가능성과 우연이 존재한다고 보고,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작용으로 삶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본다. 이러한 삶의 속성을 외면하고 부정하거나, 반대로 그저 수용하기만 하는 삶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면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 니체의 실존주의 사상이다. 니체의 운명애는 영원회귀 사상을 통해 영원에 대한 인식을 통해 순간을 변화시키는 사조로도 이어진다. 시간을 극한으로 나누면 어떠한 ‘순간’이 되고, 순간은 시간이 없는 영원한 존재이며 현재에 무한히 반복된다. 따라서 영원에 대한 인식을 통해 순간에 대한 의미를 변화시키고, 반복된 일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적극적으로 인식하며 긍정하자는 운명애 사상과도 궤를 같이 한다.

이와 같은 니체의 사상의 연장선에서 카뮈는 부조리와 반항에 대한 사유를 진행시킨다. 카뮈는 부조리란 인간이 세계와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상태로, 인간은 부조리를 의식하면서도 삶과 운명을 긍정하게 되는 장치로 작용한다고 본다. 이렇게 삶과 운명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발생하는 부조리에 대한 반항은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게 해주는 최초의 행위로 발전한다고 본다. 카뮈는 <이방인>, <칼리굴라>와 함께 부조리에 대한 3부작으로 기획한 <시지프스 신화>에서 이와 같은 견해를 진행시키며 시지프가 신에게 저항한 죄로 영원히 산 위로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하는 형벌을 받게 되는 과정을 묘사함으로써 부조리의 개념을 드러낸다. 시지프가 바위를 산 위로 올리면 바위가 산 아래로 떨어지고, 그 바위를 다시 산 위로 끊임없이 올리는 부조리 속 산꼭대기에서 내려오는 과정에서 자신의 운명을 의식하는 순간을 그려내는데 이것이 부조리에 대한 의식,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반항과 이어진다.


이 실존주의에 대한 담론을 잘 나타난 문학 작품이 있다. 한말숙의 등단작 <신화의 단애>(1957)에서는 한국전쟁 직후의 아프레게르적인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진영’이라는 인물의 삶을 그려낸다. 미대생인 ‘진영’은 댄스홀에서 일하는, 한 마디로 말해 자신의 정절을 파는 여인이다. ‘진영’은 댄스홀에서 만난 청년에게 받은 30만 원을 탕진하다가 화구와 위스키를 사서 호텔로 돌아온다. 일반적으로 천한 것으로 여겨지는 직업을 가진 ‘진영’의 삶을, <신화의 단애>에서는 긍정하고 있다. ‘진영’과 달리 자신의 지식, 혹은 노동력을 판다고 해서 그것이 ‘진영’보다 가치 있고 고결한 삶인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파는 행위라는 것 자체는 동일하다. ‘죽으면 썩는 몸이다. 살아있는 순간 다시는 없을 이 지극히 소중한 순간.’이라는 ‘진영’의 생각을 통해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의 삶에 충실한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당장 끼니도 해결하기 힘든 상황에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을 모색하는 ‘진영’은 삶의 목적을 상실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생존 자체가 목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진영은 자신이 받은 30만원으로 호텔에서 일주일 동안 묵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진영은 돈이 떨어지면 다시금 댄스홀로 나갈 것이다. 이러한 ‘진영’의 삶의 태도는 현실의 부조리를 긍정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한다. 마치 시지프스가 바위가 떨어져도 다시 바위를 굴리는 것처럼, 그리고 바위를 굴리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인식하게 되는 것처럼 신화의 ‘단애’라는 절벽에 자리한 ‘진영’은 자신이 처한 부조리, 즉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운명애적인 태도, 니체가 주창한 실존주의적 삶의 자세를 보인다.


이렇듯 실존주의라는 철학적인 사조는 20세기에 등장한 이래 꾸준히 논의되어 온 사유이고, 우리의 삶의 방식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인생은 지금이야’, ‘쏜 화살처럼 사랑도 지나갔지만 그 추억들 눈이 부시면서도 슬펐던 행복이여’,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라는 ‘아모르 파티’의 노랫말처럼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실존한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존재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눈앞의 현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아모르 파티’, 흥겨운 멜로디 속 우리에게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마음속 진한 울림을 선사한다.



사진 출처:

탑이미지 -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6522342&memberNo=29566044

알베르트 카뮈 - https://wonderfulmind.co.kr/5-quotes-albert-camus-will-change-view-life/


내용 출처: 

카뮈의 니체 해석 - 카뮈의‘부조리’및‘반항’개념과 니체의‘운명애’사상을 중심으로 – 손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