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돌아보기] 잊혀진 이름,
식민지기 여성들에 대하여 1. 정칠성

  • 470호
  • 기사입력 2021.06.25
  • 취재 최승욱 기자
  • 편집 김민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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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교육은 여성과 사회주의에 무심하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까지 활동한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에 대한 연구는 다른 남성 운동가들에 비해 소외된 점을 우리는 역사 교과서를 통해서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초중고 교육기관에서 항일단체 ‘신간회’에 대해서는 관련 인물과 함께 자세히 학습했던 기억이 있을 테지만 ‘근우회’에 대해서는 신간회의 자매단체라는 사실 그 이상으로 자세히 배운 기억이 없다. 여성운동가 정종명, 유영준, 주세죽, 고명자, 정칠성은 두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출생과 사망 연도가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았다는 점이고, 둘째는 모두 ‘사회주의 계열’ ‘여성’ 운동가라는 점이다. 출생과 사망 연대가 분명히 나와 있는 기독교, 자유주의, 급진 계열 여성운동가와는 반대되는 모습이다. 불온의 요소로 인해 역사에서 잊힐 뻔한 정칠성을 시작으로 식민지기 여성 인물들을 기억해보려 한다.

 

◎ 기생으로서의 삶

정칠성은 1897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다. 회상에 따르면 8살에 우연히 대구 관찰사의 잔치를 구경하다가 소리를 하는 기생의 모습이 부러워 기예를 배우고 이른 나이부터 관청 등에서 창을 부르는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생’은 천하다는 인식이 강하다. 전근대 사회에서도 기생은 천민 신분이기는 했지만 조금은 특별한 천민, 즉 양반의 파트너로서 글을 안다는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천민이었다. 자본주의 사회, 근대화된 사회에서 모든 기생들이 변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변신을 한 기생은 사회의 관심을 끌었다. 소위 ‘사상기생’으로 불리는 기생들의 사회 활동가로서의 변신은 주목을 끌었고 정칠성도 그런 케이스였다. 사회운동에 투신한 후에는 창을 하지 않았지만 1920-30년대까지 그녀의 시조 낭송, 창 실력이 계속해서 회자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기생은 어쩔 수 없이 부정적 인식이 있었고 정칠성은 자신이 기생이라는 사실은 숨기지 않았지만 기생으로 기억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언급하는 걸 꺼렸다. 그렇게 기생으로서의 삶을 이어가던 그는 1919년 3.1운동을 서울 한복판에서 직접 보며 뜨거운 눈물과 함께 새로운 삶의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기명인 ‘정금죽’에서 정칠성으로 개명하며 그야말로 “기름에 젖은 머리를 탁 비어 던지고 일약 민족주의자”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 근우회 이전의 사회운동

1924년부터는 사회 운동계의 전국적 조직화가 본격화되었고 전국 단위의 여성 단체 조직화의 필요성을 인식한 정칠성은 경상도 지역 여성 단체 대표들과 함께 1924년 5월 23일 경성에서 조선여성동우회를 결성한다. ‘부인의 해방’을 주장하는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운동 여성 단체가 생긴 것이었다. 정칠성은 허정숙 등과 함께 전국 각지 순회강연과 활발한 기고 활동을 통해 여성해방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925년 3월에는 두 번째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고 재봉과 편물, 자수를 가르치는 동경여자기예학교에 입학한다. 기예 학교 입학의 동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귀국 후 편물 교사를 통한 여성들의 경제적 독립을 도모하는 사업과 근우회 해체 후 정칠성의 현실적 상황을 살펴볼 때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정칠성의 두 번째 일본 유학에서 특히 중요한 사실은 그가 사회주의 여성 해방 이론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는 사회주의 서적을 널리 읽고 사회적 과제를 논의하며 사상 및 지식 습득에 매진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여성노예론을 이론화한 베벨의 『부인론』에 매료됐고 일본 여성 사회주의자 야마카와 키쿠에와 교류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습득하게 된다. 정칠성은 지역 운동을 거쳐 재일 유학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그를 통한 여성해방론을 형성한 것이다. 정칠성은 다른 여성 사회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여성해방을 위한 뚜렷한 주체이자 새롭고 진정한 신여성상으로 무산 여성을 제시하고 그에게 반봉건, 반부르주아지 이념을 부여하는 여성해방론을 주장한다. 신여성의 새로운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인텔리 계층의 기존 신여성상이 아닌 연초·제사·방직 공장 등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를 새로운 신여성상으로 제시했다. 이렇게 일본에서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을 주장하면서 귀국한 후에는 사회주의 여성운동에만 매진하게 된다. 동시에 정칠성은 여성 노동자 해방의 첫 단계는 경제적 독립에 있다고 여겼고 “무산자의 해방이 없이는 부인의 해방도 없다”라는 사회주의 사상을 이어 나갔다.


◎ 근우회에서의 활동

조선여성동우회의 일시적인 통합 뒤에는 국내 여성운동계의 내부 갈등이 극심했는데 1926년 8월 동경에 유학 중이던 삼월회 사회주의자들의 귀국으로 사회주의 여성운동 통합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정칠성은 1927년 4월 26일 근우회 발기 때 발기인 40인 중에 한 명이었고 제1회 창립준비위원회에서는 회원 모집 위원에 선임됐다. 1927년 5월 27일에는 YMCA 강당에서 근우회가 창립되었고 창립멤버였던 정칠성은 중앙집행 위원에 선임되었다. 동시에 정종명 등과 함께 대중 강연, 지역 지회 조직을 담당하는 선전조직부 위원이 되었다. 정칠성은 그중 여성의식 향상과 계몽을 위한 강연회와 토론회 분야에서 주로 활약하며 오랫동안 선전부에 소속되었다. 간사로 합류한 신간회 경성지회에서도 비슷한 소속과 활동을 보여줬다. 1920년대에 정칠성은 근우회 중앙위원 또는 신간회 간사 자격으로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벌였다. 전국 각지에 여성해방운동론을 확산시키며 여성 농민·노동자의 열악한 상황에는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정칠성은 근우회 강령 수정의 수정 위원을 겸임하기도 했는데 수정된 강령에는 농민 부인의 경제적 이익에 대한 옹호와 부인 노동자의 임금차별 철폐 및 산전 산후 2주간의 휴양과 임금지불이 새로운 방침으로 추가되었다. 출판부와 노동부도 새롭게 설립되었는데 이는 잡지 『근우』의 발간과 노동자, 농촌 여성의 중점적 지원이라는 운동 방침의 변화를 의도한 개편에 해당한다. 『근우』의 발간 과정과 지향점 역시 무산 여성, 노농 계층 여성에 대한 지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정칠성은 조선의 여성을 크게 유산계급 여성과 무산 여성계급으로 구분하고 그중 무산계급 여성을 돕기 위한 선각 여성(먼저 깨달은 여성)들의 노력을 촉구했다. 이러한 근우회 사업 방향의 변화는 농촌에서 가혹한 강도의 노동에 종사하는 농촌 여성들을 위한 농촌 탁아소의 급격한 증설과 같은 실질적인 성과를 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근우회에 대한 탄압은 계속해서 강화되어 운영의 어려움을 겪었고 정칠성의 새로운 시도도 현실적 한계에 부딪혀 장기적인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1931년 한창 근우회 해소론이 대두되었을 때 정칠성은 오히려 초심을 주장했다. 당시의 계몽 운동은 현장(농촌, 공장, 가정)에 침투한 의식적, 실천적, 조직적 계몽운동이어야 함을 계속해서 강조한 것이다.


◎ 근우회 해산 후의 삶

여성운동 또한 그들의 용기와 선구자적 노력과 관련 없이 사상과 활동 방향에 따른 내부 갈등이 존재했다. 점진적인 여성 계몽을 통한 정칠성의 여성 해방 운동을 급진적인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근우회는 결국 해소되었다. 이후에도 정칠성은 사회주의자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는 신간회 경성지회 활동을 계속했지만 정칠성의 동지들은 사회주의 활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 가거나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었다. 더 이상 사회주의 운동이 가능하지 않게 된 1930년대 조선에서 정칠성의 공식적인 활동은 찾아볼 수 없다. 정칠성은 수예점을 운영하면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수예, 편물 강습회를 여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해방까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칠성은 ‘동지 생각’이라는 글을 통해 근우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지들에 대한 그리움도 나타냈다. 정칠성은 근우회 해소 이후 1년간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고 건강상의 문제로 퇴사한 이후 경성, 평양, 대구, 통영 등 전국을 돌면서 편물 강습으로 생활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2차 일본 유학 때 기예학교에서 편물과 자수를 공부한 정칠성의 이력과 이후의 편물강습회는 경제적인 자립의 실천과 더불어 또 다른 형태의 사회 운동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정칠성은 해방 이후까지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상임위원을 비롯하여 여러 활동을 벌이다 남한 정부 수립 48년 이후 좌익계 단체 활동이 어려워지며 정칠성은 체포와 구금을 겪었다. 이후 남로당계 인사들과 월북하여 북한에서도 조선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등 여러 자리에서 활동하다 1958년 반종 파투쟁 당시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된 것으로 확인된다.

 

◎ 마치며 

사실 정칠성에 대해서는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의 사상을 따라간 아들 ‘이동수’와의 이야기도 있고 ‘기생’을 그릇된 인식으로 바라본 사람들을 향해 사랑과 성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사회운동가’로서의 정칠성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 과정 속에서 정칠성에 대한 연구는 그가 한 말과 쓴 글이 전부이고 근우회 활동 후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 정칠성은 노지승 교수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감정’이 정치적 효과를 내장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매우 어렸을 때부터 뛰어들게 된 노동의 세계, 그것도 기생으로서 처하게 되는 부당한 현실 속에서 자신도 평등한 인간임을 깨닫고 사회주의자로서 그 부당함을 해소하고자 노력했다. 정칠성은 노동의 의미를 긍정하면서도 공적 세계에서 여성으로서 느끼는 고통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통이라는 감정은 곧 이념적 자각, 정치적 자각으로 이어졌다. 정칠성은 계속된 사회운동을 통해 조선의 여성을 크게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으로 구분하고 먼저 깨달은 여성이 무산계급 여성을 도와야 한다고 봤다. 이는 농촌과 노동자 계급의 여성들을 계몽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서 점차 여성 해방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현실의 벽에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현재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그의 바람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여성의 계몽을 통한 사회운동으로서 나아가고자 했던 지향점으로 짐작해볼 수 있는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해보려 한다.


“  오늘날까지 걸어온 길이란 오로지 조선의 여성을 위해서이지만 글로써 발표한 것이나 말로써 부르짖은 것이나 모두 다 조선의 여성에게 각성하라는, 현실을 잘 파악하는 여성이 되라는 것뿐이었지요. 다시 말하면 가장 현실을 잘 알고 현실을 똑바로 보는 사람이 되라는 것뿐이었지요. 우리가 당면한 일은 여성해방입니다. 여성이 직장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부엌도 누구든지 쓸 수 있도록 개조하고 남편이든지 아내든지 먼저 집에 들어온 사람이 밥을 짓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선 만들고자 하는 것은 직장으로 가는 부인을 위한 탁아소입니다. 유산 부인은 문제 아니지만 직장에 나가는 부인이나 농촌 부인은 탁아소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조선 부인이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의 또 한 가지는 빨래입니다. 공동 세탁소에서 빨아 입을 수 있는 옷감을 선택해야 합니다.


<참고 자료>

노지승, 「젠더, 노동, 감정 그리고 정치적 각성의 순간 – 여성 사회주의자 정칠성(丁七星)의 삶과 활동에 대한 연구」, 『비교문화연구』 제43권 제0호, 용인: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2016. 6.

박순섭, 「1920~30년대 정칠성의 사회주의운동과 여성해방론」, 『여성과 역사』 제26권 제0호, 서울: 한국여성사학회, 2017. 6.

박순섭, 「[독립운동가열전] 정칠성 – 여성노동자를 대변한 근우회의 리더」, 『내일을 여는 역사』 2019년 가을호(통권 제76호), 서울: 내일을여는역사재단, 2019. 9.

이임하, 『조선의 페미니스트』, 서울: 철수와영희, 2019.

정운현, 『조선의 딸, 총을 들다』, 인문서원, 2016.

진선영, 「기름에 젖은 머리를 턱 비어 던지고 -사회주의, 여성주의, 지역주의, 혁명가 정칠성의 겹서사 연구」, 『한국문화연구』 제37권,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019.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