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감각, 사회 그리고 음악
『그래서 우리는 음악을 듣는다』

  • 537호
  • 기사입력 2024.04.12
  • 취재 이주원 기자
  • 편집 오소현 기자
  • 조회수 559

| 음악과 사람, 감각, 사회를 모두 아우르는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마녀 배달부 키키’,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의 스튜디오 지브리 OST를 포함해 지금까지 40편이 넘는 영화 주제음악을 탄생시킨 현대음악 작곡가, 히사이시 조. 그와 일본에서 대표적 지성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손꼽히는 뇌과학자이자 해부학자인 요로 다케시가 만나 삶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 속에서 두 사람은 음악뿐 아니라 사회학, 철학, 과학까지 다루며 사회나 인간의 관계 등 여러 방면에서 접근해 그들의 사상을 풀어나가고 있다.


왜 우리는 음악을 들을까? 『그래서 우리는 음악을 듣는다』에 담긴 요로 다케시와 히사이시 조의 대화 속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



- 음악에 감동하는 인간 


생물이 눈과 귀를 사용하는 이유는 다르다. 서로 다른 정보를 포착하기 때문에 두 기관을 모두 사용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평소에 이것을 의식하지는 못할 뿐, 독특하게도 눈과 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합쳐서 이해한다. 히사이시는 영화 음악 작업을 하며 영상에 빈틈없이 맞춰서 음악을 만들면 음악이 영상보다 빠르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의문을 가졌다. 이는 결국 시각과 청각의 처리 시간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아주 섬세한 수준까지 들여다봤을 때 소리와 영상의 어긋남을 느낄 수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눈으로 받아들이는 정보인 풍경과 귀로 받아들이는 정보인 소리. 시각과 청각, 이 두 이질적인 감각을 연합시킨 결과 생겨난 것이 바로 언어다. 요로는 “언어는 눈으로 보나 귀로 들으나 똑같아요.”라고 말하며 다만 두 감각을 결합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로 ‘시공간’이 있음을 짚는다.


“눈이 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습득할 필요가 있고, 귀가 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간이라는 개념을 형성해야 하지요.”


또, 뇌의 관점에서 청각은 뇌의 원초적인 부분에 직접 다다르기 때문에 정서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 눈으로 보고 감동하는 경우보다 귀로 듣고 감동하는 경우가 더 많은 이유다.



-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가


히사이시는 작곡가의 입장에서 두 가지 작곡법을 이야기한다. 하나는 의식적인 지향성, 즉 메시지와 의도로 만든 음악이다. 이런 감정을 기반으로 만드는 곡은 영감으로 시작하는데, 매번 영감이 오는 그 불확실한 타이밍을 기다릴 수는 없기에 논리성에 기반한 음악을 만든다. 순수하게 음악적인 요소만을 다뤄 음악의 구조화를 추구하는 일은 언제든 가능하기 때문이다.


“클래식의 기본인 화성학의 관점을 바탕으로 정해진 음악적 형식을 통해 시스템을 구축하고, 그 속에서 기능성에 고도로 집중한 음악은 사람을 방해하지 않아요. 그저 리듬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좋은 음악이지요.”


구조물로서의 음악은 기능성이 높기에 다작이 가능하다. 히사이시는 음악에 있어 시스템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완벽한 시스템을 만들면 그만큼 변주가 풍부한 곡을 다양하게 만들 수 있어서다. 형식을 지키는 음악일수록 시간 속에 쌓아 올리는 구조물로서 견고해지며, 이렇게 객관적으로 구축된 작품은 시대를 넘어 보편적으로 좋은 음악이 된다.



- 인간의 의식과 말


히사이시는 교향악단이 자신의 곡을 연주할 때, 작곡 의도를 설명해 주기 전과 후의 소리가 명확하게 달라지는 경험을 했다. 강하게 또는 약하게 연주하는 부분과 같이 음악을 구성하는 요소는 변함이 없더라도 소리의 차이가 나는 것을 요로는 ‘지향성’의 변화로 설명한다.


뇌의 신경 섬유는 양방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뇌로 들어가는 쪽은 구심성 신경, 뇌에서 말초 기관으로 나가는 쪽은 원심성 신경이다. 의향은 나가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원심성 작용이다. 이를 전문가들은 ‘지향성’ 즉, 의식이 어떤 대상을 향하는 작용이라고 부른다. 히사이시가 곡의 의도를 설명하자 단원들의 지향성이 달라졌고, 이 변화가 운동계의 신경에 전달되어 감각이 움직여 결과적으로 연주가 달라진 것이다.


지향성이 감각에 영향을 주는 것은 감각을 억제하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귀는 원심성과 구심성을 모두 가지고 있어 어떤 소리를 듣고 어떤 소리를 듣지 않을지를 제어할 수 있다. 반면 눈은 구심성밖에 없어 억제가 작용하지 않는다. 보기 싫은 것을 보지 않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다.


지향성의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 평소와는 다른 감각을 느끼게 되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다만 사람은 의식의 방향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거의 인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각이 달라지면 원래의 자신을 알 수 없게 된다.


“요즘 사람들은 무엇이든 의식적으로 생각하려 해요.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고정한다는 암묵적인 전제가 생겨나고요. '나'가 항상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감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걸 잘 알아요. 컨디션이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때 흔히 "평소의 내가 아니에요."라고 말하는데, 그럴 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똑같은 자기 자신은 존재하지 않아요."



- 공감과 창조


인간과 동물의 큰 차이는 상대방에게 맞춰 주는 능력이다. 흉내를 낸다는 건 맞춰 주는 일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두 사람은 함께 노래한다는 것의 의미를 찾는다. 히사이시는 타인과 함께 노래하는 것은 음정이나 리듬이 맞지 않아도 가슴에 스미는 것이라 표현한다. 타인과의 합창은 음악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이 타인에게 맞추려는 경향은 특히 공통성을 전제로 하는 ‘말’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상대를 ‘이해’하거나 ‘공감’하는 것, 다시 말해 상대방의 뇌와 자신의 뇌가 똑같이 작동하는 것이다. 요로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이해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논리가 아니라 ‘공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편 작곡가에게 공감이란 작품을 탄생시킬 때 중요한 요소다. 훌륭한 작곡가에게는 ‘개성적’이라는 수식어가 곧잘 붙는다. 그러나 작품은 공감이 되지 않는다면 의미를 잃고 만다. 완전히 독창적이며 지나치게 개성적인 작품은 오히려 타인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지나치게 대중성으로 치우치면 너무 뻔한 것을 만들어내게 된다. 요로는 그사이, 그 중간의 선 위를 걷는 것이 가장 필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독창성이란 새로운 공감을 발견하는 겁니다."



- 모든 인간은 예술가다


히사이시는 시작이 있고 고조되는 부분이 있고 끝이 있다는 점에서 음악도 사람의 일생과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한다. 두 사람의 말에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은 개개인의 일생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히사이시는 사람은 변하는 존재이기에, 인생은 작품이며 자신은 그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라고 생각할 것을 권하고 있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를 겁니다. 달라도 괜찮고요.”


개인이 어떤 작품을 만들어 나갈지에 따라 결정은 달라진다. 아무리 선의에서 나온 발상이라 하더라도 제삼자가 그 사람의 작품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보기에 형편없는 작품이더라도 타인이 예쁘게 고쳐주는 건 의미가 없다고 요로는 말한다. 본인이 선택하는 방향에 따라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 나갈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음악을 듣는 것인가라는 대주제 아래, 두 사람의 대화는 자유롭게 흘러가게 둔 이야기에 따라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다양한 주제를 다루게 되었다. 본 기사는 이 책의 중간중간 흥미로운 흐름을 발췌하여 소개했다. 이 흥미로운 대화의 흐름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면, 이 한권의 책을 직접 감상해 보는 것을 권한다.


삶 속 음악의 의미에 대한 새롭고 다양한 고찰을 원하는 당신에게 이 한권의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