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과 같이 연구 할 수 있다면..."

  • 461호
  • 기사입력 2021.02.15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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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의과대학 의학과/기초의학대학원 류동렬 교수



“너, 제정신이냐? ......”


10여 년 전에 자연과학캠퍼스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박사후연구원으로서 더 많은 경험을 쌓기 위해서 스위스로 가기로 했을 때, 주변의 한 교수님에게 직접 들은 말이다. 원색적인 표현으로 조언하신 그 교수님은 아마도 당신이 생각하는 ‘성공의 유일한 길(?)’로부터 멀어지는 실수(?)를 하려는 후학에게 조언을 던져주신 것이 아닌가 한다.  


미국동물원수족관협회(American Zoo and Aquarium Association)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약 10,000개의 동물원이 있다고 한다. 이들 동물원 사이에는 교환 프로그램이 있다. 특정 동물원에 없는 동물을 확보하기 위해서 진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미 보유하고 있는 동물에 대한 교환이 많다. 이미 보유하고 있는 동물을 교환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부족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종의 추방을 감행하는 것일까? 사실은 근친교배를 막고 유전학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건강한 동물원 구성과 유지를 위한 일이다.


유전학적 다양성(Genetic diversity)은 생물학 교과서에나 나올만한 주제로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아니다. 잠깐이라도 생각해보면 다양성은 DNA 상에서뿐만 아니라, 직업, 커피, 넷플릭스, 유튜브, 교내식당의 메뉴판에서 마저도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나열한 것들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학문적 다양성”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학문적 배경은 특정 소수의 국가에 편중되어있는 것은 아닐까? 그 편향에 따르지 않으려는 나에게 그 교수님은 조금 과한 표현의 조언을 하신 것은 아니었을까? 그 교수님의 뜻에 따라 미국에 가지 않은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자연과학캠퍼스에 돌아올 수 있었고, 학문적 다양성에 대한 글을 적을 기회를 얻었다.  


내가 택한 그 “빗나간 길”은 스위스 EPFL(Ecole polytechnique federale de Lausanne)에서의 행복한 7년이었다. EPFL은 ‘로잔연방공대’, ‘로잔공대’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스위스에 있는 2곳뿐인 연방(국립) 대학교 중 하나다. 스위스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알프스산맥과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유한 관광 국가다. 스위스는 스파이 영화에 종종 등장하기도 하는 사설 은행 서비스로 유명하기도 하다. 그 외에도 롤렉스와 같은 고가의 시계, 초콜릿, 치즈(그뤼에르, 이멘탈 치즈), 소녀 하이디, 에델바이스, 스위스 아미 나이프(일명, 맥가이버칼) 등이 스위스를 나타내는 키워드에 포함될 수 있을 것 같다. 스위스는 놀라운 자연경관과는 다르게 천연자원은 넉넉하지 못하며, 지정학적으로는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나라다. 모든 부분은 아니지만, 일부분이 우리와 닮아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더 많은 부분이 닮아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내가 스위스를 선택한 것은 “스위스”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벨기에 출신의 Johan Auwerx 교수님이 그곳에 계셨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었다. 박사과정 동안 그분은 나에게는 아이돌 스타와 같은 분이었고, ‘그분과 같이 연구를 할 수만 있다면...’이라는 상상을 하게끔 하는 분이었다. 프랑스어권인 로잔에서 살았지만, 그분과 한 번도 프랑스어로 이야기해본 적도 없다(다시 생각해봐도 bonjour, bonne journée, merci 정도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스위스, 서유럽, 동유럽, 중동 및 아프리카, 북미, 그리고 아시아 출신이 함께 연구하는 곳이라 영어가 기본적인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함께 연구하고, 월드컵과 같은 경기가 있는 날이면 교내에서 함께 영상을 보면서 맥주와 와인을 나눴다. 결혼하거나, 아이가 태어나면 가족처럼 서로 기쁨을 함께하는 곳이었다. ‘박사후연구원을 가면 같은 실험실에도 경쟁자가 있다’라는 말은 최소한 내가 있던 스위스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박사후연구원으로 처음 받은 연봉은 8만 스위스프랑(CHF, 대략 미국 달러와 1:1의 환율)이 넘는 돈이었다. 한화로는 약 1억 원에 가까운 돈이다. 실제로, 나중에는 1억 원이 넘는 연봉을 받았다. 스위스는 연봉이 좋지만, 물가가 비싸서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당연히, 스위스에서 스위스 연봉으로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스위스는 모든 직종에서 연봉이 높아서 인건비가 포함되는 서비스 업종은 당연히 한국에 비해서 비싸다. 예를 들면, 교통비, 식비, 관광 관련 비용 등이다. 스위스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생활하면 자연스레 서비스 업종을 이용할 기회가 줄어든다. 소위 말하는 마트에 직접 가보면 오히려 서울 물가가 더 비싸다고 느낄 수도 있다. 박봉과 자발적(?) 장시간 노동에 노출되는 타 국가의 박사후연구원의 삶과는 비교하기도 힘들다.


마지막으로 스위스에서 경험을 하나 더 소개하고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Dongryeol Ryu는 알파벳으로 적은 내 이름이다. EPFL에서는 보통 이메일 계정이 이름을 따라서 만들어져서 내가 사용한 이메일이기도 하며, 직관적으로 내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논문을 낼 때마다 창업관련 이메일을 받았다. 이메일 내용은 ‘우리가 약 1억 원 정도를 제공할 테니, 창업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처음에는 피싱 이메일인줄 알았을 정도다). 국적에 상관없이 학생과 연구원에게 적극적으로 창업을 장려하고, 초기 생존 자본을 제공한다. 대학 차원 것은 아니고, 스위스 정부의 프로그램인 것으로 기억난다. 제공되는 약 1억 원의 돈은 창업하는 이의 연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1년은 큰 걱정 없이 먹고살게 해줄 테니, 너의 연구에 실용화를 위한 아이디어를 더해보라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스타업들이 EPFL이라는 인큐베이터에 자리 잡고 있다. 키보드와 마우스로 유명한 글로벌 기업 로지텍이 바로 EPFL에서 스타업으로 출발한 기업의 대표적 예이다. EPFL의 며칠 전 발표에 따르면 지난 해 교내 스타트업의 가치가 2억9천3백만 스위스프랑으로 평가되었다고 한다. 지난해 COVID-19 상황을 고려하면 대단한 규모임에 틀림없다. 


건강한 동물원을 위해서는 동물들의 유전학적 다양성을 높여야 한다. 학계나 문화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많은 후배들이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복제된 클론이 되기보다, 다양성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고 스스로 만들어 보기를 응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