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율곡의 차이점

  • 502호
  • 기사입력 2022.10.28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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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칠원漆園」

古縣但遺基 옛 고을에 터만 남았는데

漆林官所植 옻나무 숲은 관가에서 심은 것이다.

見割有警言 베임 당하는 것에 깨우치는 말이 했으니

蒙莊亦高識 몽장[=장주]도 또한 식견이 높구나


이상은 칠원漆園의 관리를 한 것으로 알려진 ‘몽 땅의 장주[夢莊=莊周]의 ’무용無用의 용用‘과 관련된 몸 보전 및 처세를 높이 평가한 시다. 이 시를 지은 인물은 누구일까? 이 시를 지은 인물은 놀랍게도 노장은 양기養氣 부분에 치우쳐 적성賊性에 이르렀다고 하고, 구체적으로 장자莊子가 ‘훼성멸례毀聖蔑禮’하는 점 등을 거론하면서 장자를 폄하한 퇴계다. 이런 시는 지경持敬의 자세를 견지하고 계신공구戒愼恐懼하면서 신독愼獨 차원의 경외敬畏적 삶을 살았던 퇴계에 대한 기존과 다른 시각의 이해가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두 분은 같은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다. 가장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실제 어떤 삶을 지향했는가 하는 것인데, 그 핵심 중에 하나는 비둔을 어떻게 봤느냐 하는 것이다. 비둔을 지향한 퇴계는 산수지락을 즐기면서 천수를 누린다. 많은 제자를 둔 것은 덤이다.


2. 비둔肥遯을 통해 본 퇴계와 율곡


한 인물이 행한 행적을 기리는 글에 종종 ‘공의 나머지 일이다[乃公餘事]’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서餘事’란 용어는 아무에게나 쓰는 것은 아니다. 여사란 용어는 학문, 정치, 예술 등의 분야에서 뭔가 업적을 이룬 인물일 경우 그 인물이 ‘근본적으로 추구한 것과 대비되는 차원’에서 상대적으로 가치가 적은 것 혹은 시간이 났을 때 크게 의미를 두고 행하지 않은 것을 거론할 때 사용하곤 한다. 예를 들면 문장을 짓는다든지, 은일적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잠시 벼슬에 종사한 것 등이 그것이다. ‘명도구세明道救世’를 지향하는 유학자인 경우 예술에 장기를 보이는 경우에 사용하기도 한다.


이밖에 예술 차원에서 ‘여사’라고 말하는 경우에는 한 인물이 이성적 삶과 감성적 삶을 동시에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유일(鄭惟一, 1533~1576)이 퇴계의 여사를 문예 및 서예 차원에서 언급한 것이 그것이다.


선생은 시 짓기를 좋아하여 도연명과 두보의 시를 즐겨 보았으나, 늙어서는 주자의 시를 더욱 좋아하였다...또 그 필법에 있어서는 처음에는 진법(晉法)을 본받다가, 뒤에는 또 여러 가지 체를 취하였다. 그러나 대개는 굳세고 건실하며 방정하고 엄한 것을 주로 삼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글씨 한 자만 얻어도 마치 많은 금을 얻은 듯 보배롭게 여겼다. 그의 시문의 아름다움과 서법의 묘함은, 온 세상이 모두 스승으로 본받았으니, 여기에서 “덕이 있으면 반드시 말이 있고, 두루 통한 재주는 능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따위는 선생이 ‘여사’로 한 것이니, 그것이 어찌 선생의 인격의 경중에 관계되겠는가.


비둔의 삶을 산 퇴계에게 여사에 해당하는 것은 바로 시문의 아름다움과 심화心畵 차원의 서예다. 최립은 ‘도道의 여사는 문장이고, 문장의 여사가 시’라는 입장에서 출발하여 율곡이 시가 적은 것은 율곡의 진면목을 파악하는데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율곡에 대한 이같은 평가는 퇴계에 비해 율곡이 시가 적었던 것을 보여준다. 후대 인물들이 퇴계와 율곡의 삶을 평가한 것을 참조하면, 비둔의 삶을 추구한 인물은 퇴계이다. 퇴계는 도산에 터를 잡은 이후 읊은 「도산잡영陶山雜詠」에서 자신의 은거구지隱居求志의 삶을 비둔이라 읊고 있다. 윤두수(尹斗壽, 1533~1601)는 「율곡에 대한 제문(祭栗谷文)」에서 율곡에게 비둔은 ‘나머지 일[餘事]’에 속한다고 평하여 퇴계와 다른 삶을 살았음을 밝힌 것에 주목하자.


배운 것을 펴 보고자 하였고, 감히 행하는 일에는 용감하였네.

세상 길이 험난하여, 시비를 분별코자 힘써 싸웠네.

많은 유언비어가 하늘을 찔렀지만, 성명께서는 홀로 통촉하셨네...

오호라 슬프도다, 요순 때 임금과 백성같이 되게 하는 것이 공의 평소 뜻이라네.

임천에서 ‘살찌게 은둔하는 일[肥遯]’은 공에게는 ‘나머지 일[餘事]’이라네.


율곡이 험난한 세상에서 요순 때의 임금과 백성같이 되게 하는 것에 힘을 쏟았다는 것은 유학자가 지향하는 명도구세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 비해 ‘임천에서 은둔하는 일[肥遯]’은 공에게는 ‘나머지 일[餘事]’이라는 것은 퇴계가 비둔을 지향한 삶과 비교되는 평가다.


3. ‘퇴계’하면 떠오르는 것 두가지


조익(趙翼, 1579~1655년)이 「퇴계 이문순공에게 올린 제문[祭退溪李文純公文]」에서 퇴계의 학문과 삶에 대해 “낙민[洛學의 二程(程顥, 程頤)과 閩學의 주희]의 학문을 이어받고, 산림에 살찌게 은둔하셨도다[學紹洛閩, 遯肥山林]”라고 하여 퇴계가 비둔한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밝힌다. 조익의 이상과 같은 발언을 좀 더 확장하면, 정탁(鄭琢, 1526~1605)이 읊은 「퇴계 선생에게 올린 제문[祭退溪先生文]」일 것이다.


唯靈     오직 존령께서는

遡波伊洛 伊洛[=程顥와 程頤]을 거슬러 올라가

窮源洙泗 洙泗[=공자가 강학한 洙水와 泗水]의 연원을 찾으셨고

道尊德崇 도가 높고 덕이 숭고하여

所立卓爾 세운 바가 우뚝하셨지요

三韓千載 우리나라 천년의 역사에서

吾道在是 유학이 여기에 있었고

緬惟平日 평소의 행실을 회상하면

進退由義 의리에 따라 진퇴를 하였지요

宅幽勢阻 그윽한 곳에 집을 지으니

退溪之涘 퇴계의 물가에 위치했고

于以棲遲 이곳에서 소요하며 지내니

丘壑之美 산수의 아름다움 함께 했지요

滿架圖書 서가에 가득 찬 도서들은

百年計活 한평생의 생활이었고

風月無邊 청풍과 명월은 끝이 없어

庭草濃綠 뜰의 풀은 짙푸르러 갔지요


퇴계를 존숭하는 후학들은 퇴계가 유학의 정맥을 따라 학문한 정통 유학자의 모습과 산수지락山水之樂을 즐긴 두가지 모습을 기억한다. 그 산수지락은 이후 보겠지만 바로 퇴계가 신퇴身退한 이후에 자신의 삶을 비둔이라 일컬은 것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 퇴계 이황의 17대 직계 후손인 이치억 공주대 교수가 차례를 지낼 때처럼 유건을 쓰고 도포를 입은 채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내 동재에 섰다. 천원짜리 퇴계상과 많이 닮았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4. 나오는 말


비둔으로 규정한 퇴계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퇴계 삶의 반절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 아울러 퇴계와 율곡의 차이점을 밝혀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같은 퇴계의 비둔 지향의 삶은 당시에는 여러 가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바로 산새[山禽]란 규정이다. 자세한 것은 다음 호에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