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 화광동진(和光同塵)하지 못한 삶

  • 508호
  • 기사입력 2023.01.30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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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한국서화사를 통관할 때 추사체와 세한도로 유명한 추사(秋史) -추사는 號가 아니라 字라는 자료가 최근에 발견되었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만큼 유명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이같은 추사의 일생과 서예 성과에 대해 『철종실록(哲宗實錄)』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전 참판(參判) 김정희(金正喜)가 졸(卒)하였다. 김정희는 이조 판서[吏判] 김노경(金魯敬)의 아들로서 총명(聰明)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서적을 널리 읽었고 금석문(金石文)과 도사(圖史)에 깊이 통달하여 초서(草書)·해서(楷書)·전서(篆書)·예서(隷書)에서 참다운 경지(境地)를 묘하게 깨달았었다. 때로는 혹 거리낌 없는 바를 행했으나 사람들이 자황(雌黃)하지 못하였다. 그의 중제(仲弟) 김명희(金命喜)와 더불어 훈지(壎篪)처럼 서로 화답하여 울연(蔚然)히 당세(當世)의 대가(大家)가 되었다. 조세(早歲)에는 영명(英名)을 드날렸으나, 중간에 가화(家禍)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귀양 가는 등 온갖 풍상(風霜)을 다 겪었다. 세상에 쓰이거나 버림받고, 나아가고 물러갔던 것을 세상에서 간혹 송(宋)의 소식(蘇軾)에게 견주기도 하였다.


추사의 일생과 인물 됨됨이, 서예의 탁월한 역량을 보였다고 평가한 이같은 글에서 주목할 것은  “세상에 쓰이거나 버림받고, 나아가고 물러갔던 것”과 서예에 탁월한 역량을 보인 인물이 추사 한 사람만이 아닌데 그런 드라마틱한 삶을 소식에 비유한 것이다. 중국역사에서 소식이란 인물이 어떤 역량을 가진 인물인지를 알면 이런 평가는 그만큼 추사가 대단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추사의 이같은 고난어린 유배의 삶은 알고 보면 후대에 ‘위대한 추사’로 평가받게 하는 역설이 담겨 있다. 제주도의 위리안치의 힘든 삶은 뜻하지 않게 〈세한도〉라는 걸작의 탄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세한도〉를 이해하는 기초 자료로서 추사의 화광동진하지 못한 삶을 살펴보기로 한다.


2. 소식과 화광동진


소식이 어떤 인물인가? 비록 정치적 상황 때문에 제상이 되지 못했지만 제상감으로 여겨졌던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가진 인물로서, 유·불·도 삼교에 통달한 학자, 「적벽부(赤壁賦)」가 상징하듯 당송팔대가의 한사람으로 평가되는 문장가, 북송 사대 서예가[蘇軾, 黃庭堅, 米芾, 蔡京]로 꼽히는 서예가, 화가이면서 ‘사인화(士人畵)’ 개념을 정립한 회화이론가, ‘차와 관련된 시[茶詩]’를 가장 많이 쓴 차 전문가, 술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의 소유자다. 시인은 기본이다. 동양의 문화예술 및 학문을 논할 때 소식을 빼놓고 논할 수 없는 이유다.


소식, <고목죽석도(枯木竹石圖)>.

현재까지 전해지는 소동파의 그림은 2점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1점인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고목죽석도(枯木竹石圖)>다. 이 그림이 2018년 저녁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 나왔는데, 그림의 낙찰가는 4억 6,300만 홍콩달러(약 670억원)를 기록했다.  2018년까지의 아시아 지역 크리스티 경매 사상 최고가라고 한다. 고통과 시련을 겪었지만 그것을 극복한 이미지를 담고 있는 대단히 철학적이면서 사의(寫意)적인 그림이다. 수묵화의 길이는 185.5cm에 달한다. 그림과 함께 11세기 당대 최고 문인 유양좌(劉良佐), 유희로(俞希魯), 미불(米芾), 곽창(郭淐)의 시와 글씨가 적혀있다. 그림을 보관했던 수장가 41명의 인장도 찍혀있다.



허균(許筠, 1569~1618)은 「사우재기(四友齋記)」에서 도연명(陶淵明), 이백, 소식을 친구로 삼고자 하는데, 특히 소식에 대해서는 화광동진의 풍모가 있다고 말한다.


또 그다음은 송(宋)나라 학사(學士) 소자첨(蘇子瞻:蘇軾) 씨다. 이분은 마음이 텅 빈듯하면서도 한없이 넓은 마음씨의 소유자로서 사람들과 경계를 다투지 않으셨다.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그들과 즐겁게 어울렸으니 유혜(柳惠)[柳下惠]의 화광동진의 풍모를 갖춘 분이다. 나는 그분을 본받고 싶지만 아직까지는 역부족이다.


화광동진한 삶을 규명하는데 적용한 글귀를 보면, 허심탄회(虛心坦懷)한 마음으로 현우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과 즐겁게 어울린 소식의 삶의 태도는 화광동진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역사에서 화광동진하지 못한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로 추사가 거론된다. 김영한(金甯漢, 1878~1950)은 『완당전집서문』에서 추사의 인물 됨됨이를 ‘굳세고 방정한 성품[剛方之性]’과 ‘고결한 행동[高潔之行]’이란 두 가지로 규정하고 아울러 화광동진하지 못한 점을 거론한다. ‘굳세고 방정한 성품[剛方之性]’과 ‘고결한 행동[]高潔之行]’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존경의 대상일 경우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가 된다. 그런데 만약 상대방과 정치적 상황, 학문적 성향, 예술의 지향점 등에서 대척점에 서 있는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점과 관련해 추사에 관한 「졸기(卒記)」 내용에서 ‘때로는 혹시 거리낌 없는 바를 행했으나, 사람들이 자황(雌黃) 하지 못하였다’라는 평에 주목하자. 자황(雌黃)은 시문(詩文)의 오기(誤記)된 부분에 자황을 칠하여 정정(訂正)한 것에서부터 유래하여 흔히 시문의 첨삭(添削) 또는 변론의 시비를 이른다. 추사는 타인과 시와 비, 선과 악, 미와 추를 가리는데 상대방의 논점에 대해 반론을 펼치면서 한점의 양보가 없었던 것 같다. 이런 행태에 대해 추사의 거만함과 독선이 담겨 있다고 평가한다. 정적이었던 부사과(副司果) 김우명(金遇明)이 행한 추사에 대한 매우 부정적 평에 해당하는 “[金魯敬(추사의 부친)]의 ‘요사스런 자식[妖子]’이 항상 반론(反論)을 가지고 교활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좋은 방법으로 삼으면서도 인륜(人倫)이 허물어지는 두려움을 돌보지 않았다.” 라는 말은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요자’라는 표현은 조선조 유학사의 많은 문집에서 거의 볼 수 없는 매우 심한 욕설이면서 상대방을 혐오하는 표현에 해당한다.


추사는 소식에 비유되지만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추사는 화광동진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추사가 남쪽의 제주도와 북쪽의 북청으로 귀양 간 정황은 소식이 해남도(海南島) 등으로 귀양 간 것과 유사하지만 다른 점은 소식은 추사와 달리 화광동진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맹부(趙孟頫)의 〈소동파상(蘇東坡像)〉[타이베이(臺北) 古宮博物院 소장], 소식의 천하제삼행서라고 일컬어지는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

천하제일행서는 王羲之의 蘭亭序, 제이행서는 顏眞卿의 〈제질문고(祭姪文稿)〉다. 소동파가 쓰고 있는 관을 ‘동파관(東坡冠)’이라고 해서 이후 조선조 유학자들이 즐겨 사용한 관 중의 하나가 된다.


3. 노자의 화광동진


‘화광동진’은 『노자』 4장과 56장에 나온다. 현실 삶에 적용된 ‘화광동진’은 친밀함[親]과 소원함[疎], 이로움[利]과 해로움[害], 귀함[貴]과 천함[賤]을 기존의 차별적 언어를 통해 분별하지 말고 ‘현동(玄同)’할 것을 강조하는 56장이다. 노자는 자신의 ‘잘난 것[光]’을 강조하면 정황상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온전함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잘난 것[光]을 누그러트리고[和] 세속인[塵]과 함께 하라[同]’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승(僧) 자신이 대중보다 잘났지만 대중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이같은 화광동진의 지혜가 필요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노자』 20장에서는 분별지를 통해 분별하고 별석(別析)하지 않는 무위자연의 상징태로서의 ‘어리석음[愚]’의 철학을 전개하는데, 노자가 말한 ‘광’의 의미를 다른 차원에서 말한다면, 자신이 잘났다고 드러내는 것[自見],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自是], 스스로 공이 있다고 자랑하는 것[自伐], 스스로 으스대는 것[自矜]이다. 이런 점에 비해 화광동진은 흰 것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知其白] 검은 것을 지키고[守其黑], 남성다움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知其雄] 여성다움을 지키는[守其雌] 자세다. 휘면 온전할 수 있음[曲則全]을 아는 지혜다. 화광동진하면서 현동 사유에 입각해 타인을 대하거나 사물을 평가하게 되면 서로 간의 논쟁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 노자가 주는 삶의 처세에 대한 지혜다. 무위자연의 이치를 아는 성인이 무위의 일 처하고[處無爲之事] 불언의 가르침을 행하는[行不言之敎] 이유다.


유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같은 화광동진은 타당한 행위는 아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화광동진에 대한 견해는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화광동진하는 행동은 당초에는 자신을 보전하려는 것이었으나 그 유폐는 천함에 물들게 된다. 선현의 말씀에, “남과 매우 다른 행동을 해서도 안 되지만 또한 남과 구차하게 합하는 것도 안 된다”하였으니, 의미가 있도다 이 말씀이여!


이덕무처럼 화광동진을 남과 구차하게 합한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이같은 평가가 가능하게 된다.

중국역사에서 화광동진하지 못한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 위진(魏晉)시대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대표하는 혜강(嵇康, 223?~262?)이다. 중국역사 인물 가운데 누구 못지않게 걸출한 사상가이면서 문학자, 음악가, 서예가, 미남자였던 혜강은 사마씨 정권에 의해 향년 39세라는 짧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죽음 앞에서도 전혀 두려운 기색없이 담담한 얼굴로 금(琴)으로 ‘광능산(廣陵山)’을 켠 다음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유명하다.


안지추(顏之推, 531~591)는 후손들에게 경계의 말을 한 『안씨가훈(顔氏家訓)』에서 혜강은 화광동진하지 못했기 때문에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고 하면서 후손들에게 화광동진할 것을 요구한다. 안지추는 『안씨가훈』에서 혜강을 세 번 언급한다. “〈양생론〉을 지었지만 세속을 깔보고 오만하게 굴다가 처형당했다[嵇康著養生之論, 而慠物受刑]”라고 하여 〈양생론〉과 정반대되는 삶 – 사마씨 정권과 갈등을 야기한 것- 을 산 것을 강조한다. “혜강은 세속을 멸시하다가 비명에 죽었다[嵇康凌物凶終]”라 하고, 결론적으로 “혜숙야[=혜강]는 세속을 배척하다가 화를 초래했으니, 어찌 화광동진하는 무리겠는가?[嵇叔夜排俗取禍, 豈和光同塵之流也]”라고 단정한다.


화광동진은 아무에게나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일단 혜강과 같이 다양한 분야에 ‘탁월한 역량과 학식[광(光)]’의 소유자라는 전제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특히 난세에 화광동진의 처세술이 더욱 요구된다는 점에 화광동진이 갖는 지혜로움이 담겨 있다.


4. 나오는 말


추사는 혜강처럼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 않은 점에서 볼 때 그래도 천운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김영한의 추사의 화광동진하지 못한 것을 추사의 삶에 적용하면, 추사도 다양한 방면에 ‘뛰어난 역량과 학식[光]’을 지녔지만 화광동진하지 못했기에 제주도에 유배 가고 이후에 다시 북청에 유배 가는 등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같은 화광동진하지 못한 추사의 성격과 삶은 추사 회화의 〈세한도〉를 이해하는데 핵심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