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가 장자를 만나 나눈 대화’

  • 537호
  • 기사입력 2024.04.15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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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 전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흔히 조선조 철학사를 한마디로 개괄한다면, 조선조 500년 동안 주자학이 국가 지배이데올로기로 작동하였고 여타 나머지 학설들, 예를 들면 도가와 불가 및 양명학은 배척당한 시대라고 평가한다. 조선조의 이같은 교조적이면서 경직된 학문 경향에 대해 강력한 문제 제기를 한 인물 중 한 사람은 바로 「우리나라의 경직된 학풍[我國學風硬直]」을 쓴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다.  


조선조에는 김만중(金萬重)의 『서포만필(西浦漫筆)』, 윤근수(尹根壽)의 『월정만필(月汀漫筆)』, 윤흔(尹昕)의 『계음만필(溪陰漫筆)』, 정홍명(鄭弘溟)의 『기옹만필(畸翁漫筆)』, 장유의 『계곡만필(谿谷漫筆)』 등과 같이 다양한 만필이 있는데, 만필은 일정한 체계 없이 붓 가는 대로 글을 썼기 때문에 작자의 자유로운 사유를 엿볼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장유의 『계곡만필』은 유학자들이 비판하는 노장 철학 등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 만필보다 깊이가 있다. 『계곡만필』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장유가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맹자가 장자를 만나 철학적 대화를 나누었다는 이른바 ‘맹자와 장자의 논변을 가정한 글[설맹장논변(設孟莊論辯)]’을 쓴 것이다.


선진시대 철학 차원에서 볼 때 괴이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는 맹자가 장주(莊周[=莊子])와 동시대의 인물이면서도 서로 만나지 못했고 『맹자』 7편(篇) 중에도 ‘장주’를 언급한 대목이 없다는 점이다. 장유도 동일한 의문점을 제시하면서 쓴 글이 ‘맹자와 장자의 논변을 가정한 글[設孟莊論辯]’이다. 장유의 이 글에는 장자 사상의 핵심과 맹자가 장자사상을 어떤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는가를 한눈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장유의 철학적 깊이가 담겨 있다.


▲ 張維의 초상화. “중국에는 학술에 갈래가 많아 정학자(正學者)도 있고 단학자(丹學者)도 있고 정주(程朱)를 배우는 자도 있고 륙씨(陸氏)를 배우는 자도 있어 문경(門經)이 부일(不一)한데 우리나라는 유식무식할 것 없이, 책끼고 글 읽는 사람은 다 정주를 송(誦)하여 다른 학문이 있음을 듣지 못하나 우리 사습(士習)이 과연 중국보다 훌륭하고 그런 것인가?”(아국학풍경직[我國學風硬直])



2. 맹자의 장자 사상에 대한 비판


장자를 방문한 맹자는 먼저 자신이 장자 사상 중에서 ‘크게 의혹되는 것[大惑]’이 있다는 것을 거론하면서 그것에 대한 장자의 견해를 듣고자 한다. 맹자가 제일 먼저 강조하는 것은 장자의 말이 밑도 끝도 없이 황당무계한 주장을 펼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것에 관한 구체적인 사유로 유학에서 주장하는 차별화에 입각해 사물을 인식하는 ‘사물은 가지런하기에 동등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物不齊]’라는 것에 대해 장자가 『장자』「제물론(齊物論)」에서 ‘만물은 고루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萬物齊同]’라는 사유에 입각하여 제시한 ‘제만물론(齊萬物論)’을 제시하는 것, 생과 사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인 ‘살아있음을 즐거워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열생오사(悅生惡死)]’이란 입장이 아닌 사생을 동일하게 여기는 사유, 중심주의와 분별지를 통해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변석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옳다고 여기는 것[可]과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不可]의 차별을 무시하고 모두가 결과적으로는 같다는 주장 등을 거론한다. 맹자의 장자 사상 비판의 가장 핵심이 되는 ‘물지부제(物之不齊)’에 관한 맹자의 발언을 보자.


맹자가 말하였다. “물건이 고르지 아니한 것은 물건의 실정이니, 어떤 것은 두 배도 되고 다섯 배도 되며, 어떤 것은 열배 백배도 되며, 어떤 것은 천배 만배도 되거늘, 그대는 이것을 나란히 하면서 같다 하니, 이것은 천하를 어지럽게 함이로다. 큰 신과 작은 신의 값이 같으면 사람이 어찌 ‘이것[큰 것, 좋은 것]’을 만들겠느냐? 허자[=許行]의 도를 따르면 서로 거느려서 거짓을 하는 것이니, 어찌 능히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유학에서 만물제동을 주장하는 노장사상을 비판할 때 사용하는 가장 핵심적인 사유 중 하나가 바로 물지부제론인데 그 출발은 맹자다. 맹자가 농가(農家)를 대표하는 허자(許子[許生])의 ‘물지부제’를 비판하는 초점은 만약 사물이 고르지 않은 것을 취한다면 천하가 어지러워지는 문제점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맹자의 이같은 논리는 사물 간의 대소(大小)에 따른 가치적 차별을 인정하는 사유가 담겨 있다. 이같은 비판을 다른 차원에서 볼 때, ‘이일분수(理一分殊)’를 강조하는 성리학에서 기의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의 부제성을 통해 사물을 차별화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다음 맹자는 유가가 제자백가와 차별화하여 강조하는 인의와 예악, 인간 및 자신을 포함하여 타인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인간다울 수 있는 덕목에 대한 장자의 강력한 비판을 거론한다. 즉 장자가 사람이 부모를 비롯하여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인의를 도외시하는 것, 성인이 만들어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질서 유지를 꾀하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문주의의 근간이 되는 예악을 거짓으로 여기는 것, 효제와 충신을 통한 가족과 군신간의 도리를 덕의 부림으로 여기는 것, 인간의 감정을 대표하는 희노애락이 인간의 본성을 해치는 것이라 여기는 것을 비판한다.


더 나아가 맹자는 장자가 유가가 세상을 다스리는데 가장 이상적인 정치상을 펼친 요순(堯舜)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비난하고, 하은주(夏殷周) 고대 삼왕(三王)의 덕치를 훼손하면서 성인을 끊고 지혜를 버리고, 세상 사물의 질량을 판단하는 두(斗)와 경중을 재는 저울대[衡]를 끊는 것을 세상 다스림으로 여기는 것을 크게 의혹한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같은 맹자의 비판에 대해 장자는 비판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를 다시 요구하자 맹자는 먼저 유가의 『중용』 등에 나오는 성(性)과 명(命)을 관계를 주제로 먼저 답변한다. 즉 하늘이 하늘답게 되는 것이 명이고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이 성인데, 이름은 두 가지이지만 사실은 하나라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자연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와 만물의 존재 양상은 모두 ‘고르지 않음[不齊]’이라고 결론짓는다.

구체적으로 이들을 한데 뒤섞어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 강조하면서 만약 똑같이 하늘에서 나왔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 근본은 하나이지만, 각자 품부받아 나뉘어진 측면에서 보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음을 주장한다. 따라서 태산(太山)처럼 큰 것을 억눌러 작게 만들 수도 없고 추호(秋毫)처럼 작은 것을 늘려서 크게 만들 수도 없다는 것을 그대로 인정해 주면 순리대로 되어 행하기 쉽지만 억지를 부리면 이치에 어긋나는 결과가 야기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맹자는 인간이 만물 가운데 왜 으뜸되는 존재인지를 인간의 고유한 성(性)을 통해 입증한다. 성을 통해 입증하는 인간의 본질은 맹자가 주장하는 이른바 사단지심을 통한 윤리 실천적 인간상이다. 이같은 인간상은 이는 모두가 성(性)에서 발로된 것으로서 하늘로부터 운명적으로 품부받은 것[命]이지, 외부의 환경이 나를 변화시켜 거짓으로 행하는 일이 아닌 것이라는 점에서 성과 명의 일치를 주장한다.


기타 죽음과 삶, ‘불가’와 ‘가’는 반대되는 개념이란 입장에서 출발하여 만약 생과 사, ‘가’와 ‘불가’를 동일시한다면 사람의 도[人道]가 문란해질 것이라고 진단한다. 더불어 유가의 성인이 인간의 문화적 삶과 관련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강조한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성인이 나와 인류가 표준으로 삼아 살아갈 것을 제시한 결과라고 한다. 따라서 이같은 성인이 없었다면 인간은 금수와 다를 바가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본다. 보다 구체적으로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사람되는 근본이고, 이같은 사람되는 표준되는 근본을 제시한 분이 유가의 성인이라고 규정한다. 이밖에 맹자는 성인이 도량형을 제시한 것은 도둑질하고 간사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발언한다.


맹자는 이상과 같은 논지를 전개하면서 말끝마다 장자가 자신의 생각을 굽히고 공씨(孔氏: 儒家學派)의 방법을 따라 선왕(先王)의 도를 밝힐 수만 있다면, 맹자가 장자의 제자가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말을 한다. 이같은 맹자의 사상 전환에 대한 강압적 논지에 대해 장자는 “선생[맹자]께서 의혹 된다고 한 것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고, 선생께서 교시해 준 것들은 내가 하찮게 여기는 것들이다”이란 발언을 통해 서로 다른 입장에서 세계를 이해할 때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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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맹자의 견해에 대한 장자의 발언


장자는 위와 같은 맹자의 견해에 대해 기본적으로 ‘대도(大道)에 대한 무지’의 소산임을 밝힌다. 이에 장자 자신이 생각하는 도를 말하는데, 그 도는 바로 ‘자연’이라고 한다. 하늘도 자연의 원리에 입각하지 않고서는 하늘이 되지 못하고, 땅도 자연의 원리에 입각하지 않고서는 땅이 되지 못하며, 사람도 자연의 이치를 따르지 않고서는 사람이 될 수가 없고, 만물도 자연의 이치를 따르지 않고서는 만물이 될 수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즉 장자는 자연이라는 말 한마디로 모두 끝나는데 어찌 갈래를 많이 칠 필요가 있는지를 묻는다. 결과적으로는 자연을 떠나 갈래를 치는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그만큼 도와는 멀어진다고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장자는 맹자가 성인이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만 알지 해를 끼친 것을 알지 못했다는 점에서 맹자의 견해가 미숙하다고 규정한다.


장자의 맹자에 대한 이같은 발언은 어떤 관점에서 동일한 대상과 사건을 보느냐에 따라 서로 간의 견해가 다름을 보여준다. 오직 ‘도를 깨달은 자만이 통틀어 하나임을 안다[道通爲一]’는 입장을 견지하는 장자는 한마디로 말하면 시공간을 넘어선 불변의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즉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물지부제론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인간의 현실적 삶에 적용하면 인간이 살아가는 바람직한 도리와 그것을 불변의 진리라고 제시하는 유가 차원의 성인이란 존재는 무의미하게 된다. 왜냐하면 시대에 따라 진리는 변하기 때문이다.


장자의 반론을 들은 맹자는 선생[장자]의 말씀이 참으로 크기는 대단히 크지만 선생께서 논한 자연은 참다운 자연이 못 되고 바로 자기가 말한 것이 진정 자연의 도라고 고집한다. 맹자는 고집스럽게 만물이 서로 같지 않은 것이야말로 존재의 실상이고, 그 형세에 따라서 정법(政法)을 제정하고 변화하는 상황에 맞추어 온당한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도인 동시에 성인의 공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맹자의 말을 듣던 장자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도가 같지 않아 서로 이야기할 수가 없으니, 선생은 가 보시오. 그리고 나의 일을 흠집내지 말도록 하시오.” 하는 말을 한다. 장자의 이 말은 『논어』 「위령공(衛靈公)」에서 공자가 말한 “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道不同, 不相爲謀.]”라는 말을 응용해 발언한 것으로, 공자의 말을 통해 맹자의 논변에 일갈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맹자와 장자의 대화가 끝나는데, 이 시점에서 장유가 왜 이런 글을 썼는가 하는 점에 의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사실 맹자와 장자가 나눈 대화 내용은 철학사적 입장에서 볼 때 어떤 특별한 견해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孔子聖蹟圖》, 〈問禮老聃〉. 공자가 노자[老聃] 찾아가 예를 묻는 장면. 

노자는 병풍을 배경으로 탁자 위에 앉아 있고, 공자와 남궁경숙은 그 앞에 앉아 노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장면.



4. 나오는 말


맹자가 장자를 만났다면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하는 상상력을 발휘해 철학적 논변을 설파한 이같은 우화는 공자가 ‘노자를 만나 예(禮)를 물었다’는 우화를 연상시킨다. 공자가 노자를 만났다는 것에 대해 역대 유학 우월주의 입장에서 고답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하지만 나는 견해를 달리하여 자신을 ‘호학(好學)’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한 공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고사라고 본다.


장유가 맹자가 장자를 만났다는 우화는 공자는 노자의 말을 듣고 난 뒤 ‘오늘 내가 노자를 만나보니, 그는 마치 용과 같은 사람인가 보다[吾今日見老子, 其猶龍邪.]’라고 하는 우화와 비교된다. 장유가 맹자가 장자를 만났다는 설정은 ‘맹자가 변론하기를 좋아하여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물리치면서 공씨(孔氏: 儒家學派)의 도가 밝게 드러나게 되었다’라는 장유의 맹자 인식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장유가 이같은 우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장유 당시 조선조를 지배하고 있던 교조적 유학자들이 여타 사상을 인정하지 않고 유학의 논리에 맞게 개조할 것을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배타적 학문 경향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학문 세계 혹은 사회 전반에 장유가 비판한 사유가 적용되는 분야가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