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인생의 2막이 있다.
– 연기예술학과 학과장 김현희 교수

  • 501호
  • 기사입력 2022.10.17
  • 취재 이재윤 기자
  • 편집 김윤하 기자
  • 조회수 4600

어른들은 꿈은 아이들이나 꾸는 거라고 하지만, 인생의 2막, 중년기. 어떤 꿈을 꾸는지가 어떤 나를 만드는지를 결정한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2막이 있고, 김현희 교수는 그런 인생의 2막을 즐기는 꿈꾸는 어른이다. 이번호 인물포커스에서는 연극 <린다와 조이>에 출연한 김현희 교수(연기예술학과 학과장)와 그녀가 말하는 예술인의 삶을 다뤄보았다. 


Q. 간단한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연기예술학과 학과장이자, 연기를 가르치고 있는 김현희입니다. 현재 배우, 연출가, 안무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Q. 최근 한국 메세나협회 선정작 <린다와 조이>에 출연하셨어요. <린다와 조이>, 어떤 연극인가요? 

이 작품은 전직 잘나가던 작가이자 연출가인 조이, 그의 대학동기 후배인 린다, 두 중년의 해프닝을 다룬 연극이에요. 사고로 인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린다가 자신의 못다 이룬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동아리 선배인 조이를 찾아가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돼요. 이 이야기는 중년의 두 배우를 통해서 삶과 죽음의 이야기, 인생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 시간의 유한성과 도전, 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린다와 조이는 중년의 못 다 이룬 꿈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요. 전직 잘나가는 작가였던 조이는, 화려했던 과거와는 달리 중년이 된 자신의 삶에 회의감과 허무감을 느끼고 다시 새로운 성취감을 얻고 싶어하죠. 린다는 딸을 가진 어머니로, 자신의 꿈을 잊은 채 살다가 못다 이룬 배우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열정을 갖고 있답니다. 삶과 죽음, 꿈과 시간의 유한성, 도전이라는 심오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를 코미디로 재밌게 풀어낸 작품입니다. 

 Q. <린다와 조이>에 출연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이 작품은 배우를 두고 쓴 창작극이예요. 보통은 연극의 내용이 정해져 있고, 알맞은 배역을 캐스팅하는 식인데, <린다와 조이>는 작품의 작가이자 연출가 선생님과 함께 작품 창작과정에 직접 참여했다는 점에서 저에게 매우 큰 의미가 있었죠. 마치 배우를 위한 맞춤형 공연처럼 ‘린다’를 통해 배우로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작품에서 린다는 꿈에 대한 간절한 욕망과 이를 이루기 위한 도전이 엄청나거든요. (웃음)

이 작품을 보는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명확했어요. 중년으로 접어들게 되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꿈은 사라져요. 꿈은 어린아이들이나 꾸는 거라고 생각하죠. 이러한 생각 때문에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주저하고 꿈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린다를 통해서 중년들에게도 꿈이 있고,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어요. 젊은 학생들에게는 꿈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패해도 괜찮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었어요. 우리나라는 꿈을 꼭 직업과 연결시키잖아요. 꿈은 직업이 아니에요. 꿈은 내가 하고 싶은 게 꿈이 되어야하죠. 직업을 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위축되어 있는 젊은이들에게 마음껏 꿈꾸고 도전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Q. 나에게 ‘린다’란? 

린다는 저와 닮아 있는 구석이 많아요. 극중에서 린다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라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요. 이러한 린다의 연기와 연극에 대한 열정은 저와 매우 닮아 있어요. 지금껏 배우가 되기 위해 걸어온 과정이 저를 교수의 길로 이끌었고, 그러다 보니 현장에서 배우로 활동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어요. 어느덧 중년기에 들어서니, 배우로서 더 늦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됐고, 제자들에게도 말로만 가르치는 선생님이 아닌 실전에서 뛰는 선생님의 모습과 열정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언제든지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걸요. 실제로 제자들이 공연을 보러 많이 왔는데, 이 연극을 보고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이런 반응을 보면서 힘을 내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그런 의미에서 린다는 저에게 정말 큰 행복을 주었어요. 린다를 연기하면서 가장 무서운 관객이자, 가장 힘이 되어 주는 관객인 제자들에게 힘을 주고, 린다처럼 저도 연기나 연극에 대한 열정을 끊임없이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린다를 통해서 배우로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주변에서도 이번 작품이 ‘인생캐다’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배우로서 매우 특별한 경험을 했죠. 린다에게도 고맙지만, 저의 꿈을 맘껏 펼칠 수 있게 극을 써주신 작가님께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네요. 



Q. 함께 출연하신 전노민 배우님이 본교 연기예술학과 대학원생이라고 들었어요, 캐스팅 비화나 공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면?

공연 때 재밌었던 일화가 하나 있죠. 이번 공연이 더블 캐스팅이라 페어가 정해져 있었어요. 전노민 선생님과 저, 태항호 배우와 문현정 배우님이 같은 페어인데, 전노민 선생님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하루 공연을 못하게 되면서 태항호 배우와 당일 공연을 하게 된 거예요. 서로 바빠서 합을 맞추지도 않고 하물며 서로 연습을 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공연을 진행하게 되었죠. 처음에는 전석 매진 공연에다 상대배우와 어떤 자극을 주고받을지 예상할 수조차 없어 많이 걱정됐어요. 그런데 오히려 이때 정말 ‘살아있는’ 연기를 했었고, 너무 재밌는 공연이 되었어요. 제가 항상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게 ‘무대에서 살아있어라, 직접 듣고 보고 반응해라,’ 인데, 이 날 공연은 말그대로 “살아 있는” 공연이었어요. 상대배우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오는 떨림과 예상치 못한 극적인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두 배우가 사전에 전혀 합을 맞추지 않은 상황에서도 살아있다면, 이 감정이 더욱 증폭돼서 연극을 더 살릴 수 있구나 생각했죠. 공연이 끝나고 그 여운이 가시질 않아서 혼자 집에서 회상하면서 웃었던 기억이 있네요. (웃음)

 

Q. 예술가로서 어떤 길을 걸어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20살 때부터 배우 생활을 시작했어요. 저도 연극 영화과를 나왔거든요. 요즘은 입시학원을 통해 배우를 준비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저는 학원은 못 다녔어요. 대신 고등학생 때, 극단에서 청소년 연기자 모집 글을 보고, 극단에 가입해 고 3때 배우로서 첫 공연에 섰죠. 그 전에는 교회에서 어릴 적부터 성극 등 공연을 자주 했었고, 고등학교에서도 응원단장, 사회자로 대중 앞에 자주 섰어요. 고등학교에서는 유명인사였죠. 이런 경험들 덕분에 자연스럽게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어요. 이후, 연극영화과에 입학해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연극 공연에 많이 서게 되었고, 그 첫 무대가 아르코 대극장에서 열린 ‘휘가로의 결혼’ 이었어요. 당시 20살이었던 저에게는 매우 큰 무대였기에 기억에 남아요. 무용과 움직임 쪽에 재능도 있고 관심도 있어서 98년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최된 ‘제주 세계섬문화제’의 안무를 맞게 되었고, 배우뿐만 아니라 안무가, 연출가로서의 다양한 경험을 했어요. 러시아로 유학을 갔다 온 이후, 강단에 서게 되었고, 지금도 지도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Q. 배우안무가연출가 등 다양한 연기예술분야에서 활동하고 계신데요,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

연출가로서는 피지컬 드라마 <로미오와 줄리엣>이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에요. 이 극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의 대사를 가져가는 동시에 일부 각색하여 피지컬의 움직임을 극대화한 극이에요. 외부 중견 배우들, 우리 학교 연기예술학과 학생들이 출연했고, 졸업생인 문가영, 김남주 학생이 줄리엣 역을 맡아 공연했어요.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두 남녀 주인공의 비극을 다룬 작품으로 모두가 아는 이야기죠. 하지만 저는 이 흔한 이야기를 ‘운명’이라는 인물을 투입해 비극적인 사랑을 바라보는 ‘운명’의 시각을 제시하고자 했어요. 


작품 연출 당시 세월호의 아픔이 채 아물지 않은 상태였는데, 이때 어른으로서, 예술하는 사람으로서 ‘어른들의 잘못으로 무고한 희생을 당한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그러한 메시지를 연극에 담고 싶었죠. 로미오와 줄리엣을 주제로 한 예술작품들은 많지만, 왜 남녀의 집안이 원수 지간인지를 다룬 작품은 없었어요. 저는 이 의문점에서부터 출발하여 부모 세대에서 해결하지 못한 어른들의 문제 때문에 사랑한 죄밖에 없는 아이들이 희생당하는 상황을 극에 녹여냈어요. 아직도 등장인물 영주의 대사를 떠올리면 눈시울이 붉어지곤 해요. 외부 중견 배우들, 우리학교 연기예술학과 1학년부터 졸업생까지.. 스케일도 크고 각색, 연출에서 상연까지 많은 노력을 했기에 힘들었지만, 연출로는 저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에요. 


▲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2017)


배우로서는 이번 작품, <린다와 조이> 의 ‘린다’ 역할이 가장 애착이 가요. 쉬지 않고 춤추고 노래하고 랩하고 연기하고 셰익스피어의 독백들을 외우고, 암전 없이 의상만 7벌을 갈아입으면서 솔직히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도 이런 다양한 모습의 린다를 연기하면서 너무 재미있었고, 배우로서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서 행복했던 연기였어요. 예전에는 무겁고 비극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코미디는 이번이 처음이라 망가지는 연기가 민망하더라구요. 배우로서 망가지는 것은 물론이고 제자들 앞에서도 망가져야 했으니까요. (웃음) 우리는 누구나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잖아요. 저는 ‘카리스마’가 제 가면이었는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귀엽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어요. 평소 제자들에게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얘기하는데, 그 망가짐의 재미를 몸소 보여준 경험이어서 저에게는 더 특별하답니다. 


▲ 연극 ‘린다와 조이’의 ‘린다’ 역을 연기하는 모습

 

Q. 피지컬 드라마는 조금 생소한데요, 설명 부탁드려요. 

피지컬 드라마는 신체적 자극을 통해서 배우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신체적 접근법과 개연성 있는 서사를 접목시킨 극 장르예요. 신체적 접근법은 감정이 아닌 신체로 접근을 해서 감정이 억지로 불러일으킬 필요 없이, 신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 감정을 느끼게 되는 방식이예요. 저는 러시아 유학을 통해 피지컬을 이용한 동작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배웠고, 현재 이를 우리학교에서 강연하고 있어요. 교내에서는 햄릿, 맥베스, 한여름밤의 꿈 등 대작들을 피지컬로만 공연화했어요. 그리고 이러한 피지컬 장르가 대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가 매우 궁금했어요. 외부에서 공연 할 때 피지컬로만 가면 많은 대중들이 외면할 수 있겠다 해서, 피지컬 드라마를 만들게 되었죠. 이야기는 스토리라인 그대로 따라가고 대사도 가져가면서 배우의 심리적인 상황이나 극중에 없는 전사 상황, 대본에 있는 움직임 장면들을 피지컬화해서 공연을 올렸어요. 움직임과 음악이 굉장히 풍부해서 판타지 영화를 본 것 같다, 뮤지컬을 본 것 같다는 평을 받았어요. 이렇듯, 피지컬 드라마는 대사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시각화된 현장의 움직임을 통해서 주인공의 감정과 서사를 파악할 수 있어서 관객들을 동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Q. 앞으로 작품 활동 생각이 있으신지?

네. 저는 꾸준히 도전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도전할 계획이에요. 올해 2월에는 국립극장에서 <피에타> 라는 작품으로 모노드라마에 첫 도전을 했었고, 작년 12월 에는 2인극 페스티벌에서 상대역인 태항호 배우와 함께 연기상을 수상했어요. <린다와 조이> 이후 내년 초쯤 작품제의가 들어와서 출연할 계획이고요. 학기 중에는 학생들 가르치는 일에 집중해야 하니, 배우 생활은 매 방학때마다 틈틈이 하고 있어요. 덕분에 하루하루 쉴 틈없이 바쁘게 보내고 있지만, 저에게는 제 꿈을 이루고 있는 순간이라 너무 소중하고 즐거워요.  


Q.  아직 현장에 대한 부담감 등으로 인해 공연 예술에 대해 장벽을 느끼고 있는 학생들이 몇몇 있는데요.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공연 예술의 가치는 무엇인가요?

최근 과학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이 끝도 없이 더 좋은 것들, 더 멋있는 것들을 찾기 마련이잖아요. 하다못해 요즘 메타버스까지 등장하면서 가상세계로 우리가 모든 것들을 체험하게 된 이때, 가장 마음을 건드려줄 수 있는 것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교감이지 않나 싶어요.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과의 단절에서 오는 공허함과 외로움, 우울은 이 “교감”을 통해서 극복해낼 수 있거든요. 공연예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 바로 현장성인데, 내가 직접 보고 느끼고, 배우와 함께 호흡한다는 거예요. 


관객이 단순히 시청자로서 가만히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예술작품이 완성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공연예술의 가치라고 생각해요. 무대 위 살아 움직이는 배우들과 교감하는 그 짧은 순간이 가져오는 감동은 매우 크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자들에게 “단 한 순간이라도 살아있어라” 라고 말하곤 해요. 배우는 살아있는 한 순간을 위해서 수많은 열악한 상황과 고난을 이겨내야 하지만, 그 찰나의 한 순간으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 있거든요.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과학, 기술이 발전하여 많은 것들이 우리를 변화시키더라도, 공감’이라는 것은 꼭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연예술은 그 공감을 가장 잘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고요. 이 글을 보는 여러분들도 이러한 공연예술의 가치를 몸소 체험해 봤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