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행복하기 위한 배움,
수박 농부에서 양자역학 교수로: 공근식 박사

  • 563호
  • 기사입력 2025.05.08
  • 취재 이정빈 기자
  • 편집 김나은 기자
  • 조회수 5464

배움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삶과 함께한다. 부끄러움이 아닌 즐거움이라는 생각으로 배움에 대하여 용기를 낸다면 누구든, 언제든 배울 수 있다. 삶의 여정 동안 끊임없이 새로운 선생님을 찾으며 늘 학도(學徒)가 되길 자처해 온 공근식 박사는 올해 우리 대학에서 대학원생들을 가르치게 됐다. 러시아에서 13년 동안 박사 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금요일마다 성균관대학교로 출근한다.


스물여덟, 대전 기차역에서 우연히 마주한 야학 전단은 다시 꿈을 꾸는 도화선이 됐다. 배우고자 하는 간절함에 응답한 여러 도움의 손길 속에서, 공 박사는 행복하기 위한 학업을 이어갔다. 수박 농부에서 러시아 모스크바 물리기술원(MIPT) 박사에 이르기까지, ‘만학도의 전설’ 공 박사의 시간을 따라가 보자.


“안녕하세요. 성균관대학교에서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대학원생들에게

양자역학을 강의하고 있는 공근식입니다.”



| 1992년에는 농업 잡지에, 24년이 지나서는 모스크바 물리기술원(MIPT) 학술 잡지에 박사님의 인생을 관통하는 두 장면이 실렸습니다. 오랜 시간 만학의 길을 걷고, 성균관대학교 강단에 서신 소감이 궁금해요.

지금 성균관대학교에서 양자역학을 가르치는 것이 저에게는 참 신기하고도 운명적인 일입니다. 사실 처음에 큰 꿈을 안고 러시아에 갔을 때, 언어의 장벽에 막혀 한 학기 만에 퇴학을 당했어요.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시험 날짜를 알아듣지 못해서 결국 시험을 못 봤어요.  그런데 제가 유일하게 시험을 봤던 과목이 바로 양자역학이었습니다. 정식 과목은 아니고, 제가 원체 좋아해서 청강한 과목이었어요. 수업 시간에 갔는데 교수님께서 시험을 보라고 해서 보게 됐거든요. 그 양자역학 시험에서 제가 아주 좋은 점수를 받았고, 교수님께서 저를 다시 러시아로 불러 주셨습니다. 제가 성균관대학교에서 그런 추억이 담긴 양자역학 과목을 학생들에게 강의하고 있다는 게 정말 큰 기쁨입니다.


(좌) 농업 잡지 ‘농진종묘’, (우) 모스크바 물리기술원(MIPT) 학술 잡지)


| 박사님께서 지나오신 삶의 여정을 들려주시겠어요?

저는 고등학생 때 수학이나 물리 쪽에만 편중해서 공부했고 나머지 과목은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성적이 안 좋았어요. 2학년이 되니 격차가 더 벌어져서 결국 고등학교를 자퇴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다르게 할 것이 없으니, 집에서 수박 농사를 짓고 부모님을 도와 농사 일을 하면서 공부와는 점점 멀어졌어요. 하지만 그렇게 농사 일을 하면서 시간이 흐르다 보니 뭔가 제 마음에 차지 않는 게 있었어요. 매일 농장에 나가서 일을 하면서도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하는 마음이 해가 갈수록 점점 심해졌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수박을 출하하러 갔다가 대전 기차역에서 제 삶을 바꿀 전단지 하나를 만났어요. 늘 전단지가 붙어 있는 곳은 무심결에 지나쳤는데 그날은 저도 모르게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가서 야학교 전단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바로 야학교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저를 가르쳐 주셨던 세 분의 아주 훌륭한 선생님이 계세요. 이수석 선생님, 박현철 선생님, 또 신건철 선생님은 당시 카이스트(KAIST)에서 박사 과정에 계셨는데 자원봉사를 하려고 야학교에 와서 학생들을 가르치셨어요.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낮에는 농사를 짓고 저녁에는 세 선생님께 물리, 수학 강의를 들었습니다. 선생님들이 바쁘면 제가 카이스트에 가서 빈 강의실에서 또 강의를 들었어요. 그때 정말 행복했거든요. 그때는 답답함이라는 게 다 없어졌습니다. 이 세 분을 시작으로 제 만학의 길에는 수많은 은인이 있어요. 선생님들이 5년이 지나고 나가시는 것에 맞춰서 저도 검정고시를 보고 배재대학교에 04학번으로 입학했습니다. 배재대학교에서 물리학과 박종대 교수님을 만났고, 그분이 또 카이스트에서 청강할 기회를 선물해 주셨어요. 그렇게 이듬해 카이스트에서 청강하는데 진도가 빠른 데다 아주 어려웠기에, 저는 또 바로 옆 충남대학교를 찾아갔습니다.


딱 한 교수님, 박병윤 교수님 방에 불이 켜져 있었어요. 무작정 교수님께 가서 ‘교수님, 제가 물리 과목 좀 들어도 되겠냐’하고 물으니 기꺼이 찬성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카이스트에서 수업이 끝나면 충남대학교로 갔습니다. 거기 가서 똑같은 과목을 다시 들었고요. 그렇게 생활하다가 그때 배재대학교 화학과에 오신 고려인 교수님, 김용하 교수님께 틈날 때마다 러시아어를 배웠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 모스크바 물리기술원(MIPT) 소속 두 분의 박사 연구원님이 배재대학교에 오셨습니다. 그중에 한 분께 또 부탁했죠. 시간 있을 때 저한테 물리 수업을 강의해 달라고요. 그러자 박사님께서 응해 주셨습니다. 근데 그분이 한국어를 못하셔서 영어로 강의를 해 주셨어요. 저는 언어는 못 알아들어도 수식은 알아들을 수 있어서 열심히 따라갔습니다. 그러던 중 그분이 제게 모스크바 물리기술원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그곳에 가서 공부하면 지금 제게 없는 어떠한 시스템을 얻을 수 있다’라고요. 그렇게 저는 모스크바로 향하게 된 겁니다.


그곳에서는 한 학기 만에 퇴학을 당했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양자역학 교수님께서 저를 찾아 주셨고 물리학과에서 우주항공공학과로 과를 바꿔서 다시 그 학교에 갈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시 기술원에 들어간 이후로는 좋은 성과를 얻고 박사학위까지 받았습니다. 이후에는 더 배우고 싶어서 포닥(Post-Doc, 박사후 연구원) 과정도 들어갔어요. 그렇게 실험실에서 유럽 우주국과의 협력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전쟁이 나는 바람에 사업을 위한 자금이 모두 끊기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 실험실에 있던 러시아 학생들뿐만 아니라 외국인인 저도 어쩔 수 없이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성균관대학교 김장현 교수님께서 저에게 연락해 주셨고, 지금 성균관대학교에서 양자역학 교수로 강단에 서게 되었답니다.


| 충북 영동군이 고향이라고 들었습니다. 가까운 곳에 과학 도시 대전이 있다는 점에서, 과학을 사랑하는 박사님과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맞아요. 제 고향의 지리적인 위치도 큰 몫을 한 겁니다. 저희 농장이 섬처럼 돼 있습니다. 강 한가운데 땅이 있고 양옆으로 강이 지나가서 저희 농장 바로 아래에 물이 흘러요. 항상 농사지으러 나가면 금강을 바라보면서 물이 흐르는 걸 봤거든요. 제가 매일 보는 게 물이니까 물을 바라보면서 파동도 알게 되고 굽이쳐 가는 것도 유심히 보면서 즐거움을 찾았어요. 제가 크게 원했고, 무언가 배우고 싶은 그런 간절함으로 한달음에 찾아간 야학교에서 대전의 카이스트 물리학과 학생 선생님들을 만나게 됐죠. 영동에서 대전까지 여러 순간 속에서 저는 배재대학교, 충남대학교, 그리고 과학기술원 카이스트의 교수님들 등 많은 감사한 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 공부가 즐거워 야학에 무려 5년을 다니셨어요. 지금도 남아 있는 특별한 기억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야학 과정이 보통 1년 6개월이지만, 저는 그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배우기 위해 다닌 것이었어요. 배움을 계속하다 보니 5년이 되었죠. 야학교에는 나이 드신 아주머니분들이 많이 오세요. 대부분 고등학교를 못 다니셔서 많이 오셨습니다. 그 아주머니분들께서 선생님들 고생하신다고 야학교에서 저녁 식사를 그렇게 매일 꼭 해 주셨습니다. 선생님들도 아주 좋아하셨어요. 매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공부했던 따뜻한 기억이 지금도 가슴에 남네요.


| 미지의 땅 러시아로 떠나는 것이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어떤 결심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오로지 배움의 열망이었습니다. 러시아로 가고자 결심한 데에는 배재대학교에서 만난 교수님들과 두 분의 러시아 연구원분들의 역할이 컸어요. 그분들이 학문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서 저는 많이 놀랐습니다. 무언가 체계적인 시스템이 있었거든요. 그것을 배우고 싶은 욕망이 정말 컸는데, 그 시스템을 러시아에 가면 배울 수 있다고 해서 저는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갔습니다.


| 춥고 낯선 땅과 어려운 과업 속에서, 학사-석사-박사 과정까지 13년을 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제가 얘기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제가 그 학문을 좋아했다는 겁니다. 공부하면서 몸이 아픈 적도 많았어요. 특히 치통이 심했는데요. 러시아 속담에 어떤 말이 있냐 하면 일 년의 반이 겨울이라고 합니다. 그 말이 맞아요. 매우 춥습니다. 치통은 찬 바람을 맞으면 더 아프거든요. 제가 한 번 치통이 오기 시작하면 2~3개월씩도 가고 너무 아파서 잠을 못 잤어요. 그 때문에 음식을 잘 못 먹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면 모두 관두고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여러 번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강의실에 들어서면 그 생각이 싹 사라졌어요. 교수님이 항상 제가 모르던 새로운 것을 강의해 주거든요. 그럼 또 그것에 빠졌습니다. 몸이 아파도 교수님이 새로운 것을 알려 주시면 별것 아닌 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시간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1년 지나가고, 다시 새로운 게 등장하면 또 빠져들고 1년 지나가고, 한 해씩 지나서 그게 13년이나 지났습니다.


| 금요일마다 국제관에서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의 ‘양자역학의 세계와 빅데이터’ 수업을 지도하고 계십니다. 석사 과정에 있는 원우들과의 만남은 어떠셨나요?

학생들 전공이 매우 다양합니다. 보면 경제학과 학생도 있고, 경제 경영학과 학생도 있고, 또 전자공학 학생도 있고 전공의 영역이 매우 넓어요. 물리학과에서도 가장 어려운 과목이 양자역학인데 심지어 다른 전공 학생들이다 보니 처음에는 좀 어려워했습니다. 그게 제게도 충분히 느껴져서 그 학생들에게 최대한 맞춰서 하니까 그 학생들도 서서히 흥미를 느끼고 지금은 잘 따라와 줍니다. 그게 대견스럽고 고맙죠. 양자역학이 어쨌거나 많이 어려운 과목이거든요. 이렇게 열심히 따라오는 학생들을 보면 참 고맙고 안쓰러운 마음이 많이 듭니다.


▲ 인문사회과학캠퍼스 국제관에서


|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으로의 변화에서 특히 노력하고 있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도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고 배움으로써 지금까지 왔거든요. 제가 배우는 입장의 느낌을 잘 알고 있어요. 제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들이 어떤 마음 일지 잘 파악하고 있어요. 학생들에게 어려운 것을 조금 덜 어렵게 만들어 주려고 그 부분을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도 쉽지 않습니다. 분명 덜 어렵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자꾸만 어려워지더라고요. 더 쉽게 알려 주려고 하다 보면 예를 들어 양자역학인데 또 전자기학이나 연리학의 개념을 가져오면서 다른 학문에 손을 뻗는 경우가 있어요. 아이러니하게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연구하고 노력해 보려고 합니다.


| 30년 전으로 돌아가서 수박밭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자신을 만난다면 가장 먼저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당시 어렸던 저에게 세상은 제가 살고 있는 마을과 그 농장밖에 없었어요. 작은 세상 속, 작은 저였기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지금 와서 이야기해 줄 수 있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 시행하라”는 말을 전해주고 싶어요.



| 마지막으로, 배움의 길을 걷고 있는 성균관대학교 학도(學徒)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공부할 때, 미래의 길을 내다보기에 급급하지 말고 당장은 현재 얻을 수 있는 배움의 즐거움에만 온전히 집중하길 바랍니다. 제가 취직 시험처럼 직장에 관한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면 공부 못했을 거예요. 저는 나이도 들고 더욱 그런 것을 생각해야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러시아에서 공부할 때 정말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했습니다. 그저 내일은 무엇을 배울까, 그것만 생각했어요. '오늘 배운 거 어려웠는데 교수님 만나면 이것에 대해서 꼭 질문해야 하겠다' 딱 이 생각만 했습니다. 그래서 결과를 얻었습니다. 지금 무언가를 배우고 있는 학생들, 여러분은 공부에 더욱 신경 쓰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성급히 두 가지를 쫓다 보면 다 놓치더라고요. 공부에 진정히 임해야 그 공부에 대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