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심산은 누구입니까?

  • 기사입력 202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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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人材之未就 성인재지미취

인재로서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均風俗之不齊 균풍속지부제

정돈되지 못한 풍속을 고르게 한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올해, 11월 5일 우리 대학 인문사회과학캠퍼스 경영관 소극장에서 동문 초청 강연회 “당신에게 심산은 누구입니까?”가 열렸다. 총학생회, 에스엔젤, 그리고 심산 김창숙 연구회가 공동 주최했으며, 큰별쌤으로 유명한 역사 커뮤니케이터 최태성 동문(사학 90)이 연사로 참여했다. 최태성 동문은 우리 대학 초대 총장인 심산에 관해 이야기했다. 선대와 후대, 그리고 선배와 후배의 따스한 울림이 전해졌던 공간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 당신에게 심산은 누구입니까? 동문 초청 강연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산 동상은 늘 이곳에 저와 함께 있었어요.”

최태성 동문은 자신이 심산에 대해 몰랐던,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꺼냈다. 학교에 다닐 때 중앙도서관 앞에 있는 심산 동상 아래를 지나가면서, 그에 대해 몰랐던 과거가 부끄럽다고 말했다. 그리고 후배들만은 학교에 다니며 심산에 대해 알고, 그를 통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길 바란다며 강연의 문을 열었다.



“어떻게 민족 대표 33인에 유림 세력이 한 명도 없단 말인가?”

1919년, 3.1 운동을 계획한 민족 대표 33인에는 유학자들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몇백 년 동안 조선을 책임지고 이끈 유림이 잃어버린 조선을 되찾는 자리에 없었다. 이에 부끄러움을 느낀 젊은 유림인 심산은 유림 세력을 모아 파리장서 사건을 일으켰다. 그는 유림의 뜻을 담은 파리장서를 직접 상하이에 가져갔다. 그는 유림 세력의 의지를 알리기 위해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산 김창숙의 또 다른 호는 앉은뱅이 노인, 벽옹이었어요.”

상해로 간 심산은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위해 돈이 필요했던 그는 다시 국내로 돌아오고, 몇 개월 동안 영남 일대를 돌아다니며 부호 유림들에게 지원금을 요청했다. 이가 바로 제2차 유림단 사건이다. 그 시간 동안 그 누구도 심산을 밀고하지 않았다. 이는 모두 그의 강직함과 그를 향한 신뢰의 결과였다. 그는 이 기간에 모은 자금으로 나석주 의사의 의거를 도왔다. 나석주가 묵을 수 있는 비용, 나석주 손에 들린 총과 폭탄, 이 모든 것의 배경에 심산이 있었다. 이처럼 심산은 자금을 모아 항일운동을 도왔다. 그리고 1927년, 상하이의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던 심산은 체포됐다. 우리나라의 대구 감옥에 끌려간 심산은 변호사를 찾지 않았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게 왜 죄가 되냐는 이유였다. 당당하게 싸운 그는 수감 생활 동안 엄청난 고문 끝에 하반신을 상실했다. 그는 광복할 때까지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결국 광복 후, 감옥에서 나왔다. 자기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것이다.


“광복 직후 심산이 가장 먼저 외친 말은 친일파 청산이었어요.”

심산은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친일파를 먼저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유림 세력을 장악한 친일파를 쫓아냈다. 그리고 조선 성균관의 역사를 잇고 있는 성균관대학교를 만들었다. 평생 항일운동을 하며 다리를 잃어버릴 정도로 변절하지 않고 살아온 인물에 의해서 세워진 학교가 바로 우리 성균관대학교이다.


▲ 성균관대학 총장 시절 김창숙 (출처: 심산 김창숙 기념관)


“죽어도 서울에 가서 싸우다 죽겠다.”

심산은 자신의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약속을 위반한 이승만 정권에 저항했다. 그는 발췌 개헌에 반대하고, 성명을 내는 등 갖은 노력을 했다. 이 과정에서 국제구락부 사건이 발생했다. 핏자국이 스며든 옷, 상처 입은 머리는 민주주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헌신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심산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독재에 저항했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만들었고, 당시 80세가 훌쩍 넘은 심산은 “죽어도 서울에 가서 싸우다 죽겠다”라며 손자 등에 업힌 채 서울로 향했다.


“심산의 육신은 부서졌지만, 정신은 불꽃같이 타올랐습니다.”

심산은 진실로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하반신을 상실하고,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다. 두 아들조차 독립운동을 하다가 심산보다 먼저 눈을 감았다. 최태성 동문은 역사를 알수록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이 온전히 나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만들어진 게 아님을 알게 된다고 덧붙였다. 선비 정신이란 무엇인가? 많이 알고 있으니, 이를 가지고 사회를 위해서 무언가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선비 정신이다. 심산은 선비로서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는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심산과 똑같이 살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성균관대학교에 다니는 우리는 이곳이 어떻게 세워졌는지 알아야 한다. 심산이 새로운 교육을 외치며 세운 이 학교를 기억해야 한다. 최태성 동문은 후배들이 모두 잘 살길 응원하며, 그 과정에서 이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길 바란다는 말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최태성 동문의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학생들은 선배에게 궁금했던 점을 물으며 앞으로의 방향성을 설계해 나갔다. 질의응답 후 에스엔젤과 함께하는 퀴즈, 럭키드로우 이벤트가 열렸다. 30명의 학우와 함께하는 사인회를 마지막으로 동문 초청 강연회가 끝을 맺었다.



| 당신의 스승, 심산 김창숙 연구회 회장 하원수로부터

이번 동문 초청 강연회는 심산 김창숙 연구회와 총학생회, 에스엔젤이 힘을 합쳐 준비했다. 심산 김창숙 연구회의 하원수 회장은 우리 대학 사학과 교수로, 중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그를 만나 심산과 심산 김창숙 연구회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Q. 교수님께서 연구회장으로 계시는 심산 김창숙 연구회는 어떤 곳인가요?

심산 김창숙 연구회는 1978년 심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졌습니다. 심산께서는 해방 직후 성균관이라는 최고 고등 교육 기관을 근대적 대학으로 재편하셨습니다. 이곳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심산의 사상을 명확히 밝히고 전하겠다는 목적으로 성균관대학교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연구회가 탄생했습니다. 초기에는 심산 사상 연구회라는 이름이었는데, 딱딱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심산 김창숙 연구회로 변경됐습니다. 심산 선생님의 다양한 성격을 조망하고 연구하는 조직으로서 학술적 연구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고자 이런 이름을 지었습니다. 여전히 젊은이들에게 와닿지 않겠지만, 교수들에게는 나름 열린 명칭입니다. 최근에 학생들과 더 교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새로운 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심산은 누구이며, 나에게 심산이란?”을 주제로 한 영상 공모전을 개최했습니다. 올해는 학생들과 접점을 확대하고 깊게 만들고 싶은 마음에 총학생회와 힘을 합쳤고, 최태성 선생님을 모셔서 “당신에게 심산은 누구입니까?”라는 강연을 열었습니다.


Q. 심산 김창숙 선생님에 대해 잘 모르는 학생들을 위해 심산께서 어떤 분이셨는지 간단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김창숙 선생님은 한국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우선, 전통을 잇는 유학자이십니다. 전통적인 명문 가문 의성 김씨 출신으로 일찍부터 유학을 공부하셨고, 해방 후 유도회를 재건하는 데 중심이 되셨습니다. 한국 유학의 발전 측면에서 학자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전통 계승에 중요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특히 전통적 유학에 얽매이지 않고, 비교적 새롭게 해석하며 열린 유학을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또한, 나라를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이셨습니다. 심산께서는 조선 왕조의 쇠망을 안타까워하며, 을사늑약 때 상소도 올리셨습니다.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에 유학자가 없는 것에 굉장히 애통해하셨고, 이에 제1차 유림단 사건인 파리장서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나중에는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의 부의장을 역임하시는 등 상하이 임시정부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셨습니다. 또한, 상하이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셨고, 나석주 의사 의거, 의열단 등을 지원하셨습니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며,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여러 활동을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한국 전쟁을 거치며 통일이 절실한 과제라 말하셨습니다. 아마도 당신 세대에 나라를 분단시켰다는 부채 의식을 가지고 계셨던 거 같습니다. 이처럼 통일 운동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셨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실질적인 활동을 많이 하지는 못하셨습니다. 국민이 모두 존경했기에 돌아가신 후에는 사회장이 치러져 많은 이들의 애도 속에 눈을 감으셨습니다.


Q. 심산 김창숙 선생님께서는 우리 성균관대학교를 새로이 건립하셨는데요. 그 배경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해방 직후 성균관은 이전의 교육 기관을 대부분 잃은 상태였습니다. 해방 전, 성균관은 일제에 의해 경학원으로 격하됐고, 그곳의 유학자들은 일제에 충성하는 것이 충이라 여기는 황도유학을 했습니다. 심산께서는 이들을 일소하고, 성균관 재건에 적극적으로 임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성균관이라는 전통적 교육 기관을 근대적 교육 기관인 대학으로 개편해야겠다고 다짐하셨습니다. 아쉽게도 성균관을 국립 대학으로 설립하고자 하는 의지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유학을 근대적으로 계승한 성균관대학교를 건립하셨습니다. 자신의 개인적 입장과는 별개로 근대 대학을 만들기 위해 비교적 열린 상태로 교수를 초빙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시 교수진에는 아나키스트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미래를 이끌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을 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 성균관대학 제1회 졸업 기념 (출처: 심산 김창숙 기념관)


Q. 교수님께 심산은 어떤 의미인가요? 교수님께서 심산 김창숙 연구회의 일원이 되고 싶게 만든 이유가 궁금합니다.

성균관대학교에 부임한 후 좋은 사람을 여럿 만났지만, 이 중 가장 멋진 사람은 심산 선생님입니다. 저는 심산께서 안팎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에 매우 감동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심산 선생님께서는 제2차 유림단 사건 후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붙잡혔을 때, 곧 붙잡힐 것 같다는 우려에도 아직 병원비를 내지 못해 도망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이승만 정권 시절 이에 대립하며 많은 고초를 겪었음에도, 자신이 말한 원칙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바보 같지만 매우 올곧게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저 자신을 돌이켜 보게 했습니다.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행동도 따라가는 사람이 부족한 시대에 이런 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이번에 총학생회, 에스엔젤과 함께 “당신에게 심산은 누구입니까?”라는 제목의 동문 초청 강연회 준비하셨는데요. 이 시간을 통해 학생들이 얻어 가길 바라는 점은 무엇인가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심산께서 지금의 성균관대학교를 만드셨다는 겁니다. 학생들이 이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불가피한 시대의 아픔이긴 하지만, 우리 대학은 친일의 과거가 없는 몇 없는 학교 중 하나입니다. 이는 모두 심산 선생님 덕입니다. 그렇기에 학생들이 우리 학교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길 바랍니다. 이런 자긍심은 여러분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더불어, 우리 학교에 대한 책임감도 생기면 좋겠습니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 긍지에는 책임이 동반합니다. 심산의 실패와 성공은 우리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존경하고 싶은 어른이 없음에 아쉬워합니다. 하지만 우리 학교에는 심산이라는 진정한 어른이 가까이 계십니다. 심산의 자서전을 보면, 자신의 또 다른 호를 김우와 벽옹이라 지칭합니다. 김우란 어리석다는 뜻이지만, 어리석음은 올바른 걸 위해 손해 볼 줄 아는 것이기도 합니다. 벽옹이란 앉은뱅이를 뜻하는데, 무능해 보인다는 의미보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심산 선생님께서는 끝까지 올곧은 사람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이런 분을 기리며 긍지와 책임감을 가지며 공부하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 당신의 선배, 큰별쌤 최태성으로부터

이번 동문 초청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한 최태성 동문은 우리 대학 90학번으로, 사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학생들에게 심산의 의지를 전달하기 위해 열성을 다했다. 선배로서 후배에게 선대의 이야기를 전한 최태성 동문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Q. 심산 선생님에 대한 강연을 진행하기로 하셨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그리고 청중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가장 중점적으로 전하고자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 내가 감히 심산 선생님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까 걱정됐습니다. 너무나 큰 산 같았습니다. 심산의 뜻이 산처럼 변함없이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런 분을 제가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님께서 예전에 심산에 대해 강의하셨는데, 그런 분이 하신 걸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부담을 가지기보다, 선배가 후배에게 전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심산 선생님께서는 일생을 다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분의 삶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의 시간과 공간이 있습니다. 우리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은 사회 어디에 나가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온전히 자기의 능력만으로 하는 게 아니라 심산 선생님처럼 자신의 일생을 거름으로 내려놓으신 분이 있기 때문임을 알기 바랐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가장 전하고 싶었습니다.


Q. 오늘 강연의 주제가 "당신에게 심산은 누구입니까?" 였는데요. 강연을 들은 모든 분이 각자의 답을 찾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에게 심산 선생님이 '누구'로, 혹은 '어떤 분'으로 기억되었으면 하시나요?

“심산은 심산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변하지 않고, 일관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역사에 많지 않습니다. 심산 선생님께서는 정말 단 한 번의 일탈도 없이 일관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 자기 삶에 대해서 나쁘지 않았다고 자평하실 정도입니다. 어떻게 스스로 올바른 삶을 살았다고 얘기하나 싶겠지만, 당연히 그럴 만한 분이십니다. 우리 성균인들에게 심산은 산처럼 변하지 않는 그 마음 그 자체, 심산이기를 바랍니다.


Q. 오늘 강연에 많은 성균관대학교 구성원분이 관심을 두고 자리해 주셨는데요. 강연 소감이 궁금합니다.

이렇게 많이 와주실 줄 몰랐는데, 굉장히 놀랐고 감사했습니다.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같이 공유하고 싶었던 내용들이 있었는데요. 질의응답을 통해 제 마음이 잘 공유됐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질문 중에 “선생님에게 있어서 잘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를 듣고, 심산의 삶이 후배들에게 나름 영감을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성균관에서 심산 동상을 한 번이라도 지나간 후배들은 일상을 사는 과정에서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다음 세대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심산처럼 생각의 끈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길 바랍니다.



최태성 동문은 우리 땅에는 심산처럼 자신의 청춘을 불사하며 거름이 된 사람이 무수하며, 우리는 그 거름 위에서 피어났다고 말했다. 누구에게나 심산이 있다. 후대에는 한 나라의 민주 시민이게 해준 심산이, 후배에게는 더 넓은 세계로 향하는 인재가 되게 해준 심산이 있다. 심산은 묻는다. 당신은 어떤 심산이 될 것인가? 그리고 당신은 어떤 심산을 답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