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병(翠屛)과 조선조 문인의 아취(雅趣)
- 544호
- 기사입력 2024.07.29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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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전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흔히 ‘살아있는 울타리’로 불리우는 취병은 동양 과거 궁궐의 핵심지역과 일부 상류층의 정원에만 사용된 친환경 담에 해당한다. 이런 취병은 인위적 취병에 해당하는데, 내부가 보이는 것을 막아주는 가림막 역할과 공간을 분할하는 담의 기능을 하면서 사는 공간을 깊고 아늑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같은 인위적인 취병 말고도 자연 그대로의 취병이 있다. 이같은 취병은 퇴계와 율곡에게는 단순 자연물이 아닌 시적 정취를 불러일으키고 아울러 비덕(比德) 차원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녔다. 이런 가운데 제주의 취병담의 ‘취병’은 자연적 경관이면서 특히 바다와 접해 있다는 ‘장소’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제주도의 가볼만한 곳으로 흔히 ‘탐라십경도(耽羅十景圖)’를 거론하는데, 이 가운데 취병담(翠屛潭) 용연(龍淵)에서의 아취(雅趣) 어린 풍류는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
2. 퇴계와 율곡의 ‘취병’ 인식
과거 취병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읊은 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주로 퇴계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李珥)가 읊은 예를 통해 취병이 갖는 문인문화 및 문인미학적 의미를 살펴본다.
▲ 겸재(謙齋) 정선(鄭敾). 〈도산서원도(陶山書院圖)〉
퇴계는 동취병과 서취병이 자리한 풍수 좋은 공간에 도산서당을 점지하고, 율곡은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의 ‘삼곡(三曲)’에서 취병을 읊는다. 퇴계는 신퇴(身退)를 선언하고 자신이 살고자 한 비둔(肥遯)의 삶에 적합한 공간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도산 주위의 산세를 살핀다. 이때 퇴계는 산의 형세가 청량산(淸凉山)에서부터 뻗어 내려 물을 따라 서쪽으로 달리다가 영지산(靈芝山) 줄기와 더불어 하류에서 합친 정경에서 동과 서의 취병을 보게 된다.
동취병과 서취병이 마주 바라보면서 남쪽으로 구불구불 휘감아 8, 9리쯤 내려가다가, 동쪽에서 온 것은 서쪽으로 들고 서쪽에서 온 것은 동쪽으로 들어 남쪽의 넓고 넓은 들판 아득한 밖에서 합세하였다.
이상과 같은 균형미가 깃든 아름다운 산의 형세를 본 퇴계는 「도산잡영(陶山雜詠)」에서 동과 서의 취병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는다.
「동취병산(東翠屛山)」
簇簇群巒左翠屛 : 빽빽한 뭇 봉우리는 왼쪽의 푸른 병풍
暗嵐時帶白雲橫 : 비 개인 뒤 산 아지랑이 때때로 흰 구름이 비꼈네
斯須變化成飛雨 : 잠깐만에 변화하여 날리는 비 되니
疑是營丘筆下生 : 영구[李成]의 붓끝에서 생긴 것인가 하네
더운 여름 인간이 샤워하듯, 잠깐 내린 비를 통해 펼쳐진 동취병산의 한점의 티끌도 없는 제색(霽色)의 아름다움을 마치 북송대 유명한 화가이면서 ‘먹(墨)을 아끼기를 금과 같이 하라[惜墨如金]’고 한 이성이 붓끝을 놀려 멋진 작품으로 창작한 것 같다는 회화적 느낌과 상상력을 가미해 읊고 있다.
「서취병산(西翠屛山)」
嶷嶷群峯右翠屛 : 우뚝우뚝 뭇 봉우리는 오른쪽 푸른 병풍
中藏蘭若下園亭 : 중턱에는 절이 감추고 아래로는 뜰 안에 정자 있네.
高吟坐對眞宜晩 : 격조높이 읊조리며 마주하고 앉기에는 저녁이 정말 알맞아,
一任浮雲萬古淸 : 한번 뜬구름에 내맡기니 만고에 푸러르네.
저녁 노을이 상징하는 노경(老境)의 경지에서 바라볼 때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서취병산의 만고청상 정경을 은일적 경지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어떤 것 하나 속진(俗塵)의 흔적이 없는 맑고 비취빛을 띠는 동과 서의 취병 정경을 읊은 경지에는 바로 신퇴하고서 도산에서 비둔의 삶을 즐기는 퇴계의 청징(淸澄)한 마음이 기탁되어 있다. 동과 서의 취병은 비덕(比德) 차원에서 ‘존천리, 거인욕(存天理, 去人欲)’를 실현하고자 한 퇴계의 삶 그 자체를 상징한다. 풍수 차원의 명당자리에 동과 서의 취병이 늘어선 장소에 도산서당을 세우고 강학하면서 학문을 닦은 퇴계는 조선조를 대표하는 유학자로서 우뚝 서게 된다.
▲ 傳) 이인문(李寅文). 「孤山九曲(三曲)」 : 〈취병도(翠屛圖)〉
율곡이 「고산구곡가」의 「삼곡(三曲)」에서 읊은 취병을 보자.
三曲何處是 : 삼곡은 어디인가
翠屛葉已敷 : 취병에 잎이 벌써 퍼졌도다
綠樹有山鳥 : 푸른 나무에 산새가 있어
上下其音時 : 그 울음소리 높고 낮을 때도구나
盤松受淸風 : 반송에 맑은 바람 불어오니
頓無夏炎熱 : 여름에 더운 줄 조금도 모를레라
율곡은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최상의 장소로 ‘더위를 몰아내는 맑은 바람이 불어오고 잎이 우거져 산새가 우짖는 잎이 무성한 취병’을 통해 읊고 있다. 더운 여름을 몰아내는 맑은 바람이 불어오는 취병은 율곡이 지향한 한가로우면서도 탈속적인 삶을 상징한다.
정원에만 사용된 인위 차원의 친환경 담이 아닌 자연 정경의 취병을 기린 것에는 문인사대부들이 추구한 문화 및 미적 정취가 담겨 있다는 점에 독특한 의미가 있다. 퇴계와 율곡의 예에서 보듯 취병은 유학자들에게 주로 은일(隱逸) 지향적 삶, 시를 읊는 인물의 탈속적이면서 맑고 심성을 상징하는 장소 및 용어로 많이 쓰였다. 하지만 제주 취병담의 취병은 바다와 접한 취병이고 선유(船遊)가 가능하다는 ‘장소’라는 점에서 다른 점이 있다. 특히 취병담의 용연을 중심으로 하여 즐긴 아취(雅趣) 어린 풍류는 육지에서 누리는 풍류와 차이가 있다.
▲ 병풍과 못을 의미하는 취병담(翠屛潭)은 물색이 비취색이고 옆에 병풍같은 수직절리가 있다.
3. 제주도 ‘취병담 용연’의 아취어린 풍류
제주도에 유배 간다는 것은 유배자 당사자에게는 매우 힘든 인생살이를 겪는 것이겠지만, 생각을 바꾸면 문인사대부로서 일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없는 넓은 바다를 구경하고 배를 탈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기도 하다. 아울러 비록 타율적이지만 바쁜 관료적 삶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제주에 파견된 관료도 중앙 정부의 눈에서 조금 자유롭다는 점에서 나름 장점이 있다. 이런 정황에서 취병담의 ‘용연야범(龍淵夜汎)’ 정취와 풍류는 아무나 누릴 수 없는 독특한 경험에 속한다.
제주 목사로 부임한 이익태(李益泰)가 「탐라십경도(耽羅十景圖)」에서 읊은 ‘취병담’에 대한 것을 보자.
제주 성의 서문 밖 3리쯤에 있는 큰 내가 대독포(大瀆浦)로 흘러 들어가다가 포구에 못미칠 즈음에 용추(龍湫)가 있는데 물색이 깊고 검어 바닥을 알 수 없다. 양 언덕은 비취빛 절벽으로 푸른 낭떠러지인데, 둘레 좌우에 암석이 병풍을 이뤄 기괴한 것이 눕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다. 취병담의 형세는 서로 구부러져 길이가 수백여 걸음이 되고 깊숙하면서도 고요하고 맑다. 배를 타고 오르내리면 마치 그림 속에 있는 듯하다. 하늘과 물이 한가지 색이고 안개와 노을이 조금 아득하게 펼쳐질 때, 바다 밖으로 놀러 가 구경하는 것은 최고의 빼어난 경치를 감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 나오는 ‘병담범주(屛潭泛舟)’의 정경.
배 안에서 기생이 북치는 모습도 보인다. 맨 위쪽 산에 ‘백록담’이 표시되어 있다.
취병담에서 즐긴 아취 어린 풍류와 자연 정경이 바로 한폭의 문인화에 해당한다는 것에는 조선조 문인사대부들이 지향하는 문인취향과 풍류가 물씬 담겨 있다. 명대 오종선(吳從先)이 쓴 『소창청기(小窓淸記)』에는 문 앞에 선 산봉우리가 우뚝이 빼어난 산속에 사는 양원(羊元)이 “‘이 취병(翠屛)은 저녁때 대하는 것이 마땅하니, 사람 마음과 눈을 상쾌하게 한다’고 하자 안노공(顔魯公:顔眞卿)이 그 산을 취병산이라고 명명했다”라는 글이 나온다.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는 두보(杜甫)가 읊은 「백제성루(白帝城樓)」에 나오는 시어로서, 주희도 『무이잡영(武夷雜詠)』 「만대정(晩對亭)」에서 이런 정경을 “푸르고 높게 차가운 하늘과 가지런한데[蒼峭矗寒空], 저녁놀은 푸른 절벽을 선명하게 비추네[落日明影翠]”라고 읊은 적이 있다. 이처럼 시인 및 유학자들이 취병을 저녁 노을이 지는 즈음과 연계해 그 아름다움을 읊곤 하였다.
특히 제주에서만 누릴 수 있는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는 밤에 취병담의 용연에 배를 띄운 채 즐긴 풍류는 백미에 속한다. ‘밤에 용언에서 배를 타고 노닌 경지를 노래한 것’인 「용연야범가(龍淵夜帆歌)가 그것이다. 소동파(蘇東坡[蘇軾])가 칠월(七月) 기망(旣望)에 일엽편주를 띄운 상태에서 읊은 「적벽부(赤壁賦)」를 본받아 지은 「용연야범가」에서는 도교 신선(神仙)의 삶과 관련된 ‘동천(洞天)’과 ‘별유천지(別有天地)’[縱一葦之所如(종일위지소여)하야, 深邃洞天(심수동천드러가니, 疑乃聲中萬古心(의내성중만고심), 別有天地(별유천지)이 아니냐]라는 용어를 통해 탈속적이면서 은일 지향의 아취어린 풍류를 표현하기도 한다.
4. 나오는 말
과거 조선조에서 학문과 문화적으로 열악한 지역일 수밖에 없는 땅이었던 제주에 유배온 인물들이 끼친 긍정적 측면 가운데 문인들이 추구한 우아함을 숭상하는 이른바 ‘숭아(崇雅) 정취’를 들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밤에 바다에서 배를 타고 누리는 이같은 용연야범의 정취는 육지에서는 누릴 수 없는 가장 독특한 경험이 아닌가 싶다.
제주도의 취병담은 육지가 아닌 섬에 있다는 장소적 특징이 있다. 한국인의 뱃놀이는 선유(船遊)라는 이름으로 즐겼는데, 주로 큰 강인 대동강, 한강, 낙동강 등지에서 많이 행해졌다. 과거 문인사대부들이 바다에서 배를 탄다는 것도 매우 드물지만, 바다를 접한 곳에서 배를 타고 유희를 즐긴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큰 배를 타고 정해진 목적지를 가는 것과 아름다운 취병이 있는 바다를 접한 장소에서 배를 타고 아취(雅趣)어린 풍류를 즐겼던 선유는 아주 다른 이야기다. 제주 취병담의 용연에서 배를 타고 즐긴 풍류는 이런 점에서 특별한 점이 있다. 특히 ‘용연야범’은 더욱 남다른 풍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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