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당파성과 노장사상 이해 다양성

  • 587호
  • 기사입력 2026.05.14
  • 편집 성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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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민환(전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노자는 리(理)를 몰랐다.”


조선조 유학사에서 리를 극존무대(極尊無對)하다고 높이면서 노장을 양기(養氣) 차원에서 ‘리는 귀하고 기는 천하다[理貴氣賤]’라고 규정한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노자를 이상과 같이 한마디로 비판한다. 리가 무엇인가? 퇴계는 리는 ‘알기 어렵다[難知]’고 했다. 그렇다면 퇴계는 리의 어떤 점을 통해 노자는 리를 몰랐다고 규정한 것일까?

퇴계의 리를 중심으로 한 이단관 및 노장 비판의 전모를 아는 것은 조선조 유학사에서  『노자』와  『장자』가 어떻게 이해되었는지의 핵심에 속한다. 아울러 거시적 관점에서 볼 때, 조선조 유학자들의 노장(老莊)에 대한 이해 방식은 조선 유학 내부의 사상적 수용 구조와 해석 태도를 드러내는 중요한 지표로 기능하며, 이를 통해 조선 유학의 당파적 분화 양상에 따른 각 학파의 철학적 경향성을 비교·분석할 수 있다.


▲ 西溪 朴世堂(1629~1703) 초상. 조선조에서 유일하게 『노자』와 『장자』를 주석한 인물.

『思辨錄』은 송시열을 추종하는 반대파에게 斯文亂賊으로 몰리기도 하였다.



2. 퇴계와 율곡의 노장사상 이해 개괄


조선조 유학자[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자학자]들이 ‘리와 기는 서로 섞이지 않는다[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과 ‘리와 기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라는 두 가지 입장에서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이단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예를 조선조 유학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퇴계 이황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철학적 입장을 비교하면서 살펴보자.

퇴계는 ‘리가 작용함에 기가 따른다[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와 ‘기가 작용함에 리가 올라탄다[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라는 것을 주장하지만, 결과적으로 리를 중심으로 한 ‘주리(主理)’ 차원에서 이기불상잡의 입장을 견지한다. 이같이 이기호발설에 보이는 리에 대한 기의 종속성을 강조하는 사유는 ‘기’에 해당하는 노장을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희박하게 만든다. 그 결과는 앞서 본 바와 같이 ‘노자는 리를 몰랐다’라고 하거나, 리 차원의 유학은 귀하고, 기 차원의 노장은 천하다’라는 ‘이귀기천’으로 귀결된다.

리를 중시한 이황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가 갖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 율곡에게는 노장이 부정의 대상만은 아니다. 율곡은 ‘기가 작용을 하고 리가 그 위에 올라타는 한길 밖에 없다[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과 ‘이와 기의 묘합[이기지묘(理氣之妙)]’를 통한 이기불상리의 입장을 견지하는데, 흔히 ‘주기(主氣)’라는 차원에서 말해지는 이런 사유는 ‘기철학으로서 노장 사상’이 선택적 차원에서 수용될 수 있는, 이른바 유학과의 ‘공존 가능성’이 있게 된다. 즉, 리로서의 유학과 기로서의 노장의 ‘불리성과 묘합성’을 꾀한다면, 퇴계처럼 벽이단 입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된다. 율곡이 ‘유가의 입장에서 『노자』를 해석하는 시각[以儒釋老]’에 해당하는 『노자』 주해서 성격의 『순언(醇言)』을 저술할 수 있는 이유다. 아울러 이 같은 율곡의 진리에 대한 개명성과 개방성은 이후 율곡을 추존하는 후대 인물[西人]들의 노장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나타나게 된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었을 때, 특히 소론에 속하는 인물들이 노장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주목할 것은 퇴계의 ‘이기불상잡’ 차원의 주리철학을 계승한 영남학파들처럼 벽이단 의식이 강한 경우 ‘이기불상리와 주기철학을 설파했다’고 평가하는 율곡까지도 이단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 시발점은 이식(李植)이 ‘이기불상리’에 대해 ‘내 안의 적’이란 사유를 전개한 것이 그것이다. 이후 이 같은 ‘내 안의 적’ 개념은 폭넓게 전반적으로 주자학에 대한 이해 차이에 입각한 사유를 배척하는 상징이 된다. 조선 후기 영남 남인 학자인 유건휴(柳健休)의 『이학집변(異學集辨)』은 이같은 이단관의 결정판에 해당한다.



3. 퇴계와 율곡 이후의 노장 이해


퇴계와 율곡 이후의 조선조 유학사에 전개된 학술 경향과 그 경향에 따른 이단관의 전모 및 노장 이해를 도식적으로 정리하면, 퇴계를 추존하는 영남학파들의 경우 ‘리와 기를 하나의 사물[理氣一物]’로 봐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서 ‘노불(老佛)’은 물론 양명학(陽明學)[더 크게 보면 육왕학(陸王學)]도 이단으로 여기는 정황으로 이어진다. 상대적으로 이기지묘(理氣之妙)와 이통기국(理通氣局)을 말하는 율곡을 추존하는 경우는 노장을 전폭적으로 수용하거나 혹은 선택적 차원으로 노장을 받아들인다는 차이점을 보인다. 이런 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조선 숙종 때 이이를 추존하는 서인(西人) 붕당의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이란 두 파벌 가운데 대체로 이른바 소론에 속하는 인물들이 주로 이런 경향을 보인다. 이런 현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조선 후기의 수도권에 학문 경향과 정치 성향에 따라 구분된 몇 개의 지식인 그룹에 적용해 그들의 노장에 대한 이해를 도식적으로 구분해 보자.*




* 지식인 그룹의 분류는 편의상 김문식의 분류 방식[국사편찬위원회 간행, 『한국문화사』권24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제5장 실학의 세계관(새로운 학문의 정보 교환 부분)」, 두산동아, 2011, pp.236~240. 참조.]을 따른다.



노론은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으로 구분된다. 호론계 지식인이 충청권에 거주했다면 낙론계 지식인은 수도권에 거주했다. 수도권에 살던 노론 낙론계 그룹에는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성해응(成海應), 김정희(金正喜), 조인영(趙寅永), 권돈인(權敦仁) 등이 있다. 이들은 노장에 대해 수용하는 경우도 있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노론은 집권당으로서 보수적인 경향이 있다고 언급되지만, 인간과 금수[物]의 본성이 같은지 다른지를 논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 인물성동론을 주장한 낙론과 인물성이론을 주장한 호론의 노장 이해에는 차이가 있다. 인물성동론의 경우 ‘인간[人]’과 ‘사물[物: 禽獸]’의 관계에서 ‘물(物)’에 노장이 들어가면 선택적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런 점에 비해 인물성이론을 주장하는 경우 ‘물’에 해당하는 노장이 들어갈 여지가 별로 없다. 그 하나의 예로 호론에 속한 인간과 사물의 다름을 주장한 인물성이론자(人物性異論者)인 한원진(韓元震)이 『장자변해(莊子辨解)』를 써서 장자 사상을 매우 독특하게 ‘기일분수(氣一分殊)’ 차원에서 비판한 것을 들 수 있다. 하지만 한원진의 경우 속내를 보면 반드시 비판만 하지 않은 것도 발견할 수 있어 이중성을 보인다.


▲ 南塘 韓元震(1682~1751) 초상


주목할 것은 조선 땅에서는 오랑캐라고 비하했지만, 실제 중국에 가서 청나라의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와 화려한 문물을 접한 경험이 있는 북학파로 분류된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은 노장을 수용하거나 때로는 노장을 통해 당시 조선조의 정치, 학술 상황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즉 노장을 이해할 때 『장자』 「추수(秋水)」에서 말한 ‘우물 안의 개구리[井底之蛙]’와 같은 소지(小知)에서 벗어나 대지(大知)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은 때론 강력한 시대 상황 비판으로 전개되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의산문답(醫山問答)』을 써 『장자』 「제물론(齊物論)」의 ‘만문제동(萬物齊同)’ 사유와 연관성이 있는 인물균(人物均) 사상을 말한 홍대용은 조선조 후기 주자학 중심의 남인계열에서 행해지는 차원의 이단관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박지원이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다양한 소재를 중심으로 한 소설[許生傳, 穢德先生傳 등]을 통해 풍자한 것은 이런 점과 관련이 있다.


▲ 손자 朴周壽 작. 朴趾源(1737~1805) 초상


수도권에는 소론계 지식인 그룹이 있었는데 윤증(尹拯), 박세당(朴世堂), 서명응(徐命膺), 서형수(徐瀅修), 이만수(李晩秀), 신작(申綽), 홍양호(洪良浩), 홍경모(洪敬謨) 등이다. 이 같은 소론계 지식인들은 대체로 노장에 대해 긍정적인 면을 보이거나 때론 ‘유가 입장에서 노자를 해석[以儒釋老]’하기도 한다. 이런 경향은 소론 일각에서 노론계열 주자학자들이 경직된 주자주의와 의리지학 일변도로 몰고 가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며, 노론식 주자주의를 반성하고 주자학에 대한 자유로운 연구를 추구해 나감으로써 탈주자적 경학풍을 보인 점**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노자』 주석서인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과 『장자』 주석서인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를 쓴 박세당을 들 수 있다. 서명응이 겸허의 처세술을 배웠다는 차원에서 『노자』를 주석한 『도덕지귀(道德指歸)』도 주목할 만하다.




** 유봉학, 『조선 후기 학계와 지식인』, 신구문화사, 1998. 참조


▲ 保晩齋 徐命膺(1716년~1787)) 초상



수도권의 남인계 지식인 그룹[近畿南人]은 이익(李瀷), 안정복(安鼎福), 권철신(權哲身), 이맹휴(李孟休), 이가환(李家煥),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등이다. 이들은 퇴계 영남학파와 관계가 있는 이익을 중심으로 그 후손과 제자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노장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견해도 보이지만 선택적 차원에서 긍정하기도 한다. 이익의 영향을 받은 신후담(愼後聃)이 『노자』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그것이다. 다만 신후담은 서학(西學:천주교)에 대해서는 벽이단의식이 강하다.


4. 나오는 말


이상 살펴본 내용을 도식적으로 정리해 보자. 소론에 속하는 인물들이 대체로 노장을 긍정적으로 보고, 남인에 속하는 인물들은 이황의 벽이단의식의 영향을 받아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인다. 다만 영남남인과 근기남인은 차이점을 보였다. 이런 점 이외에 주목할 것은, 노론이라면 노장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견지할 만한데, 연행사(燕行使) 등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경험이 있는 인물인 경우 긍정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노론의 영수인 이의현(李宜顯) 같은 인물이 그 예다. 조선조 노장사상사를 규명할 때 꼼꼼하게 살펴볼 대목이다.

이상 본 바와 같은 당파에 따른 노장 이해의 도식적 분류는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논란이 있지만, 조선조 유학자들의 노장 이해가 학파 및 당파에 따라 어떻게 나타났는지 하는 큰 얼개를 밝히는 것에는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