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新)인류의 통신, ‘PC통신’

  • 474호
  • 기사입력 2021.08.26
  • 취재 천예원 기자
  • 편집 윤서빈 기자
  • 조회수 4755

우~ 샤랄랄라 우~ 샤랄랄라 우~ 샤랄랄라 우~ 샤랄랄라

맘에 안드는 그녀에게 계속 전화가 오고

내가 전화하는 그녀는 나를 피하려 하고

거리엔 괜찮은 사람 많은데 소개를 받으러 나간 자리엔

어디서 이런 여자들만 나오는 거야 ~ ♬♪

- 015B ‘신인류의 사랑’ (1993)




‘신(新)인류’ 

한 세기가 무한한 궤도의 축 뒤로 사라질 준비를 하는 사이 그 다음 세기를 넘어다 보는 세대. 우리는 그런 세대(X세대)를 ‘신인류’라고 칭했다. 구질구질한 순애보 사랑노래만 가득하던 80년대와는 다르게, 그들은 한국의 공교육을 비판하고(서태지와 아이들, <교실 이데아(1994)>) 오래된 연인과의 권태를 노래한(015B, <아주 오래된 연인들(1993)>) 그때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주제의 노래를 들으며 20대 청춘을 보낸 세대다. 이전 세대와 차별화된 정체성을 가진 세대라는 것은, 신인류 그들 나름대로의 정체성이었다.


하지만 기술이 아무리 빠르게 발전한다고 할지라도 라디오에게 보내는 종이로 된 엽서가 하루 아침에 빠르고 간편한 카카오톡 사연 신청으로 바뀔 수는 없는 일, 신인류 X세대의 대중문화는 오늘날 2021년의 대중문화와는 사뭇 다른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 그 어디쯤의 오묘한 세기말 분위기를 풍긴다. 이번 ‘문화읽기’에서는 21세기를 앞둔 20세기 문화의 집결지, ‘PC통신’에 대해 알아보자.



한석규, 전도연 주연의 영화 <접속(1997)>은 PC통신 ‘유니텔’의 채팅을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되는 두 남녀에 대해 그린 로맨스 영화다. 오늘날의 우리가 온라인 상에서 사용하는 가벼운 무게의 언어들과 다르게, <접속> 속의 두 주인공들은 진중한 편지 글과 같은 말투로 채팅을 이어나간다. 당시의 X세대가 다른 세대에 비해 컴퓨터 사용에 익숙한 세대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여전히 아날로그의 흔적을 지우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PC통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당연하지만 컴퓨터가 필요했다. 통신을 위해 필요한 모뎀을 개인 컴퓨터에 설치하면 PC통신망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지는 방식이다. 서태지 6집 <태지(2000)>의 수록곡인 ‘인터넷 전쟁’에 이 모뎀이 실행되는 소리가 삽입되어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물론 굳이 컴퓨터가 아니더라도, 컴퓨터의 형태를 본 떠 만든 (하이텔)단말기를 무상으로 대여받아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이 단말기는 컴퓨터에 비해 기능적으로 제한적인 부분이 많았다.


<접속> 속 주인공들은 ‘유니텔’이라는 이름의 PC통신 플랫폼을 이용한다. ‘유니텔’ 외에도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등의 PC통신 서비스가 존재했는데, PC통신 서비스 사이에서도 그 연령층과 사용 용도가 어느 정도 갈리는 편이었다고 한다. 가령, <접속>의 두 젊은 남녀가 사랑을 키우는 바탕이 되었던 ‘유니텔’은 신세대가 즐겨 사용한다는 이미지가, 그보다 앞서 서비스를 시작한 ‘천리안’과 ‘하이텔’ 등은 연령대가 있는 사용자가 많다는 인식이 강했다.


PC통신망에 접속하면 각자의 ID(닉네임)을 달고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다. PC통신은 오늘날 온라인 환경과 같은 그래픽 인터페이스가 갖추어지지 않은 텍스트 기반의 매체였기 때문에, PC통신의 원하는 게시판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키보드로 명령어를 입력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대표적인 예시로 PC통신 서비스 ‘하이텔’은 컨텐츠 탭에서 ‘뉴스/매거진’, ‘생활/가정’, ‘방송/연예’, ‘홈뱅킹’ 등의 서비스를, 커뮤니케이션 탭에서 ‘네티즌광장’, ‘대화실’, ‘동호회/모임’, ‘게임/바둑’ 등의 유저 간 소통 중심의 메뉴를 서비스했다.


‘PC통신’에 대해 이야기하면 당시 활성화된 넷상 커뮤니티와 채팅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채팅방에 접속하면 다양한 주제의 채팅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퀴즈방 형태의 채팅방이다. 김영하 작가의 장편 소설 <퀴즈쇼>에 등장하는 닉네임 기반 퀴즈 채팅방의 전신 정도 되시겠다. 퀴즈방의 테마도 크게 ‘음퀴방(음악퀴즈방)’, ‘영퀴방(영화퀴즈방)’, ‘상퀴방(상식퀴즈방)’ 등으로 나뉘었다. 출제자가 스무고개식으로 문제에 대한 힌트를 던지면 그 힌트로 정답을 추측해 맞히고, 정답자가 문제를 출제하는 방식으로 채팅이 진행되었다. 종종 회전율이 좋은 퀴즈방 같은 경우에는 회원들끼리 만나 모임을 가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이 ‘정모’와 ‘번개’ 문화의 시초이다.



채팅방 외에도 ‘머드게임’ 컨텐츠는 상당히 센세이셔널했다. ‘머드게임’이란 ‘Multi User Dungeon’의 준말로, 텍스트를 기반으로 진행되는 PC통신 게임이다. 사용자 편의와 게임의 재미를 위해 텍스트로 그림을 구현하려는 시도가 왕왕 있었지만 결국 머드게임의 본질은 텍스트였다 (사진참조). 그래픽 인터페이스가 갖추어지지 않은 게임이다 보니 유저는 직접 텍스트로 명령을 입력해 게임 상의 캐릭터 위치를 이동시키거나 적에게 공격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빠른 타자 속도가 요구되는 게임 방식이기도 하다. 인기를 끌었던 게임으로는 ‘단군의 땅’, ‘퇴마요새’, ‘쥬라기공원’ 등이 있는데, ‘퇴마요새’는 1993년 PC통신 ‘하이텔’의 게시판에서 인기리에 연재된 소설 <퇴마록>에 기반을 둔 머드게임으로 유명하다.



2015년 천리안의 서비스 종료를 끝으로 한국의 PC통신 시대는 막을 내렸다. 초고속 인터넷의 보급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PC통신의 등장은 그야말로 ‘개인’의 발견이었다. PC통신이 일상생활 밖의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PC통신의 컴퓨터 세상은 어떤 취향을 가진 개인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그들의 취향을 다지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공간이 되었다. 국내 밴드 ‘자우림’과 ‘언니네 이발관’이 모두 국내 PC통신 동호회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단순한 소통 매체 이상의 의미를 가졌던 그 시절 ‘PC통신’이 ‘신인류’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을까를 떠올려보며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