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목격자 핏자국을 찾아라 <br>혈흔검사(血痕檢査)

침묵의 목격자 핏자국을 찾아라
혈흔검사(血痕檢査)

  • 335호
  • 기사입력 2015.11.14
  • 취재 김나현 기자
  • 편집 김혜린 기자
  • 조회수 16636

정육점 주인 이모씨는 우발적인 살인에 당황했다. 쓰러진 상대방의 등 뒤로 피웅덩이가 점차 커져가자 범인은 하는 수 없이 시체를 유기하기로 했다. 유기한 장소까지 점점이 번진 혈흔(血痕)을 보자니 곧 잡힐 것 같았다. 다행히 늘 돼지나 소의 피가 흐르던 정육점 바닥이라 깨끗이 닦기만 한다면 문제없어 보였다. 꼼꼼히 벽과 주변을 닦고, 범행도구로 사용된 칼을 씻는 등 유력한 물증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다했다. 가게에 CCTV도 없고 새벽이라 목격자도 없는 상황, 범인은 어떻게든 잡아떼기만 한다면 알리바이를 만들 여지가 충분했다. 과연 이 범인은 안심하고 수사망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범죄현장에서 '핏자국'이란 굉장히 중요한 단서다. 뚜렷한 핏자국이나 피해자의 피가 묻은 도구를 발견하는 것이 순조로운 범인 검거에 박차를 가하는 유력한 증거로써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서 핏자국이 순조롭게 발견되지 않는다. 위의 시나리오와 같이 살인을 저지른 뒤 증거를 인멸하는 시도는 범죄이후 흔하게 보인다. 벽에 튄 핏방울은 깨끗이 닦이거나 피 묻은 칼 등은 대부분 물에 씻기거나 아예 범행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버려지기 일쑤다. 용의자의 옷이 깨끗이 세탁된 상태라면 육안으로 핏자국을 확인하기는 더욱 힘들터. 핏자국이 발견되더라도 범인을 단정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위의 시나리오와 같이 가해자가 정육점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피가 필연적으로 묻기 때문에 '육안으로 혈흔이 발견'됐다고 해서 그를 용의자로 단정할 수 없는 특이사항이 생길 수 있다. 사라진 핏자국 또는 어지럽게 섞인 핏자국의 경우 당국은 어떻게 숨어있는 목격자 '혈흔(血痕)'을 찾을 수 있을까?

루미놀시약은 위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특징을 갖고 있다. 피가 10,000~20,000배 희석돼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혈흔에 예민하다. 혈흔에 이 시약을 뿌리면 파랑 형광으로 빛을 낸다. 혈흔을 찾기 위한 가장 첫 번째 단계는 범행 현장에서 혈흔이 발견될만한 위치에 루미놀 시약을 뿌리는 것이다. 범행현장이 실내이면 사방을 어둡게 만들어 발광반응이 나는지 확인한다. 옷가지, 카시트 등 섬유에 묻은 혈흔이 닦여도 혈흔 속 철분성분이 스며들었다면 수개월이 지나도 루미놀시약에 반응한다. 범인이 증거인멸을 위해 옷을 세탁해도 혈흔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루미놀 시약은 타액, 정액, 소변 등 사람의 다른 체액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사람의 혈액에만 반응하는 것도 장점이다.

루미놀 시약이 발광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바로 루미놀시약 속 루미놀(Luminol)이 산소와 만나 산화하면서 빛을 내는 것이다. 정확한 원리는 시약의 준비재료부터 살펴봐야 안다. 루미놀시약은 루미놀(Luminol: 3-aminophthalic acid hydrazide)1g, 무수탄산나트륨 50g, 30% 과산화수소수 500mL에 증류수 100mL를 첨가해 만든다.

루미놀을 산화시키기 위해선 당연히 '산소'가 필요하다. 그 산소를 제공하는 원천이 과산화수소다. 과산화수소는 산성 용액보다 알칼리 용액(재료에선 무수탄산나트륨 + 증류수) 속에서 산소로 분해되는 데, 이에 철, 구리 촉매가 더해지면 분해반응이 크고 빠르게 일어난다. 여기에서 그 촉매 역할을 하는 것이 혈흔 속 '헤민(헴 ? heme)'이다. 헤모글로빈은 4개의 헴을 가지고 있는데 헴의 중심에는 철성분이 들어있다. '헴'이 산화되면 '헤민(h(a)emin)'이 되며, 철 촉매로써 과산화수소의 분해를 촉진해 산소를 만든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산소는 루미놀을 산화시켜 발광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과산화수소를 다른 산소를 만들어내는 과산화물로 대체해도 똑같은 반응이 일어난다. 루미놀이 산화되는 반응만 도출하면 되기 때문이다.

루미놀시약은 이처럼 혈액 속 철성분을 촉매로 삼아 산화시킨 루미놀이 빛을 발하면서 찾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루미놀 시약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생겨난 단점이 있다. 루미놀 시약은 사람의 혈액과 동물 또는 곤충의 혈흔을 구분하지 못한다. 혈액 속 헤민이 있는 개체라면 분명 다 같은 발광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루미놀을 산화시키는 매커니즘은 과산화수소 분해로 얻은 산소다. 과산화수소를 분해하는 촉매는 철, 구리 화합물이라고 앞서 언급했다. 말하자면 루미놀 시약은 혈흔뿐만 아니라 철, 구리로 이루어진 사물에서도 똑같은 반응을 나타낸다. 이 경우 혈흔에서와는 다른 빛깔을 띠게 되는데 굉장히 미묘한 차이라, 전문가가 아니면 식별하기 힘들어 루미놀 시약은 전문가의 손을 거쳐 신중히 뿌려진다. 루미놀 시약은 사람의 피부를 손상할 수 있는 유독물질이라 보호장비를 착용하고 다뤄야 하며 혈흔 속 DNA에 약간의 손상을 가져올 수 있다. 매우 소량의 흔적만으로도 찾아낼 수 있는 만능(萬能)의 시약인 줄 알았던 루미놀 시약은 그 '예민성'에는 탁월하나 금속, 다른 동물의 혈흔을 혼동해 똑같이 발광한다는 점에서 그 '특이성'은 떨어진다. 억울한 용의자를 만들지 않으려면, 적어도 '핏자국'이 맞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어떤 시약이 더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LMG' 시약이다.

로이코마라카이트 녹(綠)(Leucomalachite Green, LMG) 시약은 루미놀 시약에서 나타난 혈흔반응을 추가로 확인하거나, 빨간 페인트 또는 인주 등 붉은 사물에서 혈흔을 찾고자 할 때 쓰인다. LMG 시약은 마라카이트 녹 1g, 빙초산 100ml, 증류수 150mL를 넣어 제조한다. 혈흔 시료를 채취해 필터페이퍼에 놓고 LMG 시약을 떨어뜨린다. 그 위에 3% 과산화수소수를 떨어뜨리면 만약 진짜 혈흔일 경우 시료가 '청록색'으로 변하여 퍼져나간다. 과산화수소가 산소로 분해되면서 이 시약이 산화되어 색깔이 변하는 것이다. LMG 시약은 400배까지 희석된 혈액까지 검출할 수 있어 예민성은 루미놀 시약보다 떨어진다. 하지만 여러 가지 혼동변수가 있는 루미놀 시약보다 그 특이성은 뛰어나, 혈흔을 정확히 판별하는 데 탁월하다. 따라서 루미놀로 혈흔을 찾아내고, LMG 시약을 써서 구리 촉매 등의 오판별을 줄이는 것이다. 하지만 LMG 시약에도 문제점이 있다면 역시 사람과 다른 동물 개체의 혈흔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LMG 시약도 판별 원리에 혈액 속 '헴'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빙초산을 사용해 만드는 시약이라 루미놀 시약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유독하다. 정리하자면 당국은 범행 현장 속 혈흔을 감지하기 위해 루미놀 시약과 LMG 시약을 병행해 사용한다. 정육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경우 인간과 가축의 혈액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단 말인가?

루미놀 시약과 LMG 시약은 핏자국을 발견할 수 있지만, 여러 개체의 핏자국이 어지럽게 섞여 있는 범죄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다. 혈흔에서 사람의 DNA가 발견된다면 인혈증명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유전자가 발견되지 않으면 부득이 인혈증명방법으로 사람의 혈흔인지 판별한다. 침강반응 중층법, 피브린(Fibrin) 평판법, 면역겔확산법등이 있으나, 최근에는 상품화된 인혈반응 키트를 사용해 간단히 확인한다. 침강반응 중층법과 면역겔확산법은 모두 항원-항체 반응을 이용한다. 실험토끼의 몸속에 사람의 피를 조금씩 주입해 면역시킨 후 '항사람면역혈청'을 만든다. 이후 침강반응 중층법에서 혈청을 모세관에서 표면을 안정시킨 후 시료를 넣어 침강선의 유무를 확인한다. 면역겔확산법은 한천에 여러 구멍을 뚫은 후 중앙에 항 사람 면역혈청을 떨어뜨린다. 나머지 일정한 길이로 떨어진 구멍에 각각 채취한 시료를 넣으면 인혈이 있는 시료와 항사람면역혈청 사이에 침강선이 생겨난다. 이렇게 항 사람 면역혈청을 사용하지 않는 판별법인 피브린 평판법은 섞은 용액이 인혈이 묻어있는 시료 주변에서 녹아내리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인혈검사가 상품화된 키트 중 대표적인 것은 FOB 키트로 채취한 시료가 인간의 피라면 두 줄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루미놀 시약과 LMG 시약을 비롯해 사람의 혈액인지 판별하는 도구까지 갖춰진 현대의 수사대는 계속 과학적 혁신을 거듭하고 있다. 2009년 대구지방경찰청에서 혈흔검사 시약을 발명해 특허출원한 소식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시약의 원료 성분이자 아프리카에서 자생하는 나무의 이름을 따 `구아이악(Gum guaiac)'으로 명명한 그 시약은 유독한 루미놀 LMG시약과 달리 독성이 없으며, 상대적으로 재료비(1g당 116원)가 저렴해 앞으로 주목받을 것으로 예상한다. 위의 시나리오에서 살인사건 범인인 이모 씨는 정육점이라는 장소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변수가 없다면 충분히 과학 수사에 의해 검거되지 않을까 예측한다. 살인이란 끔찍한 사건 속에서 가장 유력하게 범인을 가리키는 것 중 하나는 피해자의 혈흔이다. 말 없는 목격자라 할 수 있는 혈흔을 고스란히 되찾을 수 있게 된 오늘날의 과학은 더는 억울한 죽음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참조 - DNA분석과 과학수사 : 살림지식총서 319, 박기원, 2008. 2. 25., ㈜살림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