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돌아보기] 우리 유물을 지킵니다
- 간송을 기억하며

  • 466호
  • 기사입력 2021.04.22
  • 취재 최승욱 기자
  • 편집 김민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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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다양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작품에서 중요한 건 무엇일까? 물론 만들거나 그린 사람이라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오래된 작품은 창작자뿐만 아니라 ‘보존자’도 분명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우리나라는 혼란기를 겪어왔다. 전쟁도 하고 일제강점기도 있었다. 그때 상당한 유물들이 외국으로 유출되어 유실되거나 훼손된 일이 많다. 그렇다면 지금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고미술품을 볼 수 있는 것은 누구 덕분일까? 바로 보존자다. 자신이 직접 유물을 모아 후세에 넘겨준 고마운 분들은 참 많지만, 그중에서도 한국 고미술계의 최고 보존자라고 할 수 있는 분은 간송 전형필 선생이다.


● ‘문화 독립운동가’ 간송 전형필 – 자신을 바쳐 한국 문화를 지키다

간송 전형필은 사라져가는 우리나라 문화재를 수집하여 보존했다. 간송은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이 민족의 자존심과 존엄을 지키고 되찾는 일이라고 생각한 선각자였다. 한일 합병 이후 국권이 상실되고 일본인이 들어옴에 따라 서화, 골동품 같은 문화재들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무지했던 백성들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청화백자 같은 보물들을 고양이 밥그릇으로 사용하는 등 문화재를 파손시키고 소멸시켰다. 설상가상으로 정치인들이 우리 유물들을 골동품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에게 뇌물로 바치거나 무더기로 밀반출하여 재산을 불리면서 우리 문화재는 불운의 시기를 맞았다. 이런 시기에 간송은 이대로 국외로 흘러 나가게 해서는 안 되겠다며 유물 수집에 나섰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되던 옛 그림과 고려청자, 조선백자, 삼국시대 불상, 귀한 활자로 만든 책 등 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문화재를 지켰다. 이미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재 중에서도 꼭 찾아와야 할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서면 값을 따지지 않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했다. 지키고 되찾아왔기에 그는 문화 독립운동가였다.


간송 전형필이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인사동에 있던 한남 서림을 인수한 1932년 전후다. 그의 나이는 불과 26세,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다. 화가도 아니고 문인도 아니고 와세다 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그가 어떻게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갖고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일까? 그것도 평범한 수집이 아니라 우리 문화유산을 대표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국보급 문화재들을 수집했다. 그가 수집한 서화만으로도 조선시대 미술사를 서술할 수 있고 그 반대로 그가 수집한 서화가 없으면 미술사를 온전히 서술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작품들을 어떻게 모은 것일까? 


그의 곁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우리나라 역사소설의 선구자인 월탄 박종화, 그의 이종사촌 형이었다. 간송 전형필은 어린 시절부터 그를 통해 우리나라 역사와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또 한 사람은 3.1 만세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명이자 당대의 감식안이자 수집자였던 위창 오세창이었다. 그는 오세창을 스승으로 모시고 안목과 감식안을 전수받았다. 그는 박종화의 영향과 오세창의 가르침을 통해 일제 강점의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고 그 깨달음을 실천했다. 그래서 그의 수집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고 그것이 다른 수집가들과 다른 점이다. 미술사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 수집이었기에 체계가 있었고 중요한 것을 모으다 보니 아름다움은 자연히 얻어졌다. 


수집은 열정과 의지만 있다고 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간송은 서울 출신으로 1906년 중추원 의관이었던 전영기의 아들로 서울 배우개장 부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배우개장, 지금의 동대문 시장에서 큰 장사를 하여 돈을 많이 버는 사람으로 전형필의 부모는 서울에서 다섯째 안에 드는 큰 부자였다. 대학 3학년 때 192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약 4만 마지기의 논을 상속받았다. 당시 만 석을 수확하는 논의 가치는 서울의 8칸짜리 기와집 천 채 값이었다. 일제강점기 화폐단위로 백만 원이었고 그래서 만석꾼을 ‘백만장자’라 부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기록에 의하면 당시 만 석 이상의 재산을 가진 조선인은 43명뿐이다. 그런데 그는 2만 석을 수확하는 논을 상속받았으니 서울의 좋은 기와집 2천 채, 요즘 집값으로 환산하면 최소 6,000억 원의 재산가가 된 것이다. 매년 수확하는 쌀을 기와집으로 계산하면 기와집 150채였다. 연 수입은 요즘 가치로 약 450억 원 정도였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재산이었고 백만장자 중에서도 상위에 속했다. 그러나 재벌급 부자가 된 청년 전형필은 사업을 하거나 유유자적 편안하게 사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의 생활은 검소했고 생활 태도도 달랐다. 의복을 입는 것도 항상 검소해 늘 한복을 입고 다니고 무명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그는 스승 오세창이 지은 서화가 인명사전인『근역서화징』을 보면서 신라시대 솔거부터 조선 말 철종 때까지 1,117명의 서화가에 대한 옛 감식안들의 품평을 공부했다. 그중 훌륭한 품평을 받은 화가가 있으면 오세창이 엮은 옛 서화가들의 화첩인『근역화휘』에서 그들의 작품을 눈여겨보면서 안목을 높여갔다. 오세창은 그런 청년 전형필에게 깊은 산속에서 흐르는 산골 물 ‘간’ 자와,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는 문장에서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소나무 ‘송’ 자를 합해 ‘간송’이라는 아호를 만들어줬다.


간송이 서화 골동품 수집을 시작한 것은 동경 유학 중에 부친상을 당해 돌아왔을 때부터였다. 이때 서화 골동품을 수집하면서 고문격으로 모신 사람이 오세창이었다. 우선 간송은 서울 성북동에 있는 1만 평짜리 산장을 부래상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프랑스 사람에게 사들여 북단장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그 안에 수집한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성북동에 최신 시설의 미술관을 세우고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뜻에서 ‘보화각’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곳이 바로 현재 수장고 신축공사와 내부 복원공사를 위해 휴관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이다. 간송은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는 서화 골동품 수집에 총력을 기울이며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 정도 안목이 생긴 이후로 지금은 없어졌지만 인사동 중턱에다가 ‘한남서림’이라는 고서점을 집안사람을 시켜 경영했다. 고서적을 팔고 사는 가게인데 이곳이 간송이 서화 골동 등 유물들을 사들이는 본거지였다. 거간들은 이곳으로 물건들을 가지고 나오고 물건이 들어오면 간송이 달려와 감정하고 흥정했는데 간송은 감정이 정확해 섣불리 속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간송이 고서화나 골동품에만 집착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현대작가를 지원했다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간송은 1940년 전후해서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작품도 수장했다. 또한 보성고보 재단을 인계하여 동성학원의 이사장이 되고 믿는 사람에게 학교를 맡긴 다음 일체 학교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후, 간송 전형필은 미술사학자들과 함께 남은 소장품들을 정리하며 보다 규모 있는 박물관을 구상하던 중 갑작스레 닥쳐온 병마로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하다가 1962년에 세상을 떠났다.


● 간송미술문화재단 주요 소장품 – 간송이 어떻게 수집했는가를 중심으로

1.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간송 전형필은 당시 값이 너무 비싸 조선인 수집가들이 엄두를 못내 일본으로 유출되던 청자 수집에도 큰 공을 기울였다. 서른 살이 되던 1935년에 일본인 골동품상인 마에다에게 기와집 20채 값인 거금 2만 원을 주고 학이 69마리 새겨진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구입했다. 얼마 후 일본인 수집자가 기와집 40채 값을 제시했지만 그는 그 국보를 지켰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매우 아름다운 청자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2.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1936년에는 경성미술구락부에서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을 조선 경매 사상 최고가인 1만 4580원을 들여 일본인 대수장가들을 물리치고 낙찰받았다. 서울 시내에 있는 큰 기와집 한 채가 1000원 남짓하던 시절, 집 수십 채를 살만한 거금이 투입된 것이다.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또한 최상의 백자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처럼 간송 전형필은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 좋은 서화나 도자기가 나오면 참가했다. 기와집 16채 값에 낙찰받은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을 비롯해 <백자청화동자조어문병>,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 중 한 점인 <예서 대련>, 심사정의 <노응탐치>, 변상벽의 <자웅장추>, 정선의 <고사관폭도> 등이 경매를 통해 수집한 작품들이다.


3.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1937년에는 일본에 거주하던 일본인 수집가 존 개스비의 고려청자 20여 점을 일괄 인수하기 위해 공주의 논 1만 마지기를 처분했다. 기와집 400채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이었다. 요즘 가격으로 환산하면 최소 1,200억 원이다. 당시 구입한 고려청자 중 7점은 광복 후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었다. 사진에 있는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을 포함하여 <청자기린유개향로>,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 <청자오리형연적>, <백자박산향로>, <청자상감포도동자문매병>, <청자상감국모란당초문모자합>이 그때 일본에서 되찾아 온 청자 백자들이다. 당시 일본에 살면서 최고급 고려청자만을 수집하다가 귀국하게 된 영국인 존 개스비는 자기 나라 문화를 고국으로 가져가겠다는 간송의 애국자적 태도에 감탄해서 개스비 컬렉션의 청자 백자들을 양도한 것이었다.



4. 훈민정음

간송 전형필의 수집품 중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가장 소중하게 여긴 문화재는『훈민정음 해례본』이다. 광화문 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이 바로 간송 전형필이 기와집 10채 값을 주고 구한『훈민정음 해례본』이다. 


간송은 1940년 7월 중순 오후 석양녘에 우연히 한남 서림에 들러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책 거간으로 유명한 어느 인사가 모시 두루마기에 바람을 일으키며 그 앞을 바쁜 걸음으로 지나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바쁜 걸음을 하는 것은 반드시 사연이 있을 거라 생각한 간송은 이순황에게 급히 그를 불러와 사연을 물었다. 


그는 경북 안동에서『훈민정음』원본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구해 오기 위해 돈을 마련하러 간다는 것이었다. 그 돈의 액수를 물으니 다시 큰 기와집 한 채 값인 1천 원이라 했다. 간송은 아무 소리 않고 돈 1만 1천 원을 내주며 1천 원은 수고비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훈민정음』원본이 간송의 손에 들어오게 되고 지금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1945년 8월 1일 마침내 해방이 되었지만 전형필은 고적 보존 위원으로 위촉되어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를 정리 보존하는 일에 참여하느라 자신이 수집한 문화재를 정리하고 박물관을 개관하는 일은 훗날로 미뤘다. 그러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보화각에도 북한군이 들이닥쳤고 그들은 그곳에 있던 국보급 문화재를 전부 북쪽에 빼앗길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포장할 사람으로 불려온 국립박물관 최순우 학예관과 수집가이자 서예가인 소전 손재형의 포장 지연작전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5. 촉잔도권

간송은 ‘현재 심사정’의 작품도 많이 수집했다. 조선시대 꽃나무들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초충도 화첩인『현재첩』을 비롯해 심사정의 일생일대 대작으로 심혈을 기울여 그려 낸  <촉잔도권>를 구입하여 복원 수리했다. <촉잔도권>은 길이가 8미터가 넘고 폭이 60센티미터 가까이 되는 유례없는 대폭 산수도권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말대로 간송은 5천 원에 구입하여 일본 교토에 보내 수리를 시키고 표구를 깨끗이 했는데 그 비용이 6천 원이었다고 한다. 구입비로 기와 채 5채 값, 수리비로 6채 값을 지불한 것이다.


6. 그 밖의 소장품들

간송에게 서화를 갖다 파는 거간꾼이었던 장형수라는 사람이 친일파 송병준의 집에서 아궁이에 들어갈 뻔한 걸 간신히 수장한 겸재 정선의 42쪽으로 이루어진 화첩과 <해악전신첩>, <풍악내산총람도>부터 혜원 신윤복의 <혜원전신첩>과 <미인도>, 단원 김홍도의 <마산청앵>과 <낭원투도>, 긍재 김득신의 <야묘도추>까지 다양한 조선시대 서화 작품이 간송미술관의 소장품으로 있다. 이 작품들은 고서화에 크게 관심이 없더라도 학교 미술 시간에 배웠거나 따라 그렸을 정도로 유명하고 가치 있는 작품들이다. 간송은 이외에도 국보인 <동국정운>과 <금동삼존불감> 등 서화부터 도자, 전적, 금속, 그리고 석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간송미술관의 소장품이나 작품에 대한 설명이 궁금하다면 ‘간송미술문화재단’ 사이트로 접속하여 ‘간송미술관 – 주요 소장품’으로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다.

 

● 간송의 전시를 찾아서 – 간송미술관과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의 사후인 1965년, 간송 측근의 고고미술동인들이 최순우, 황수영, 진홍섭, 김원룡 등이 발기인이 되어 ‘한국민족미술 연구소’가 설립된다. 동시에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으로 개칭하여 연구소의 부속 박물관으로 두고 1966년부터 본격적으로 유물들을 분류하고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71년 가을부터는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매해 봄가을에 한 번씩, 일 년 두 차례의 전시회를 개최해서 간송미술관 수장품을 일반에 공개했다. 한국민족미술 연구소의 연구 성과와 이를 바탕으로 기획한 간송미술관의 전시는 1980년대에 들어와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1990년대 후반 경부터는 대중적인 관심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 문화 예술 전반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2008년 조선 후기 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의 일대기를 픽션화한 드라마 <바람의 화원>의 흥행과 함께 대중적인 인지도가 급증하였다. 이후 간송미술관에서 개최하는 전시에는 예외 없이 수만 명의 관람객이 운집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그러나 70여 년을 지나온 건물과 소수의 연구진만으로 수만을 헤아리는 인파를 감당하기는 버거웠다. 전시 공간과 관람 환경에 대한 개선 요구가 잇따랐다. 이에 간송의 유족들과 연구소에서는 변화를 바라는 시대적인 요구에 부응하기로 결단을 내리고 2013년 8월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제2의 도약을 도모했다. 그 시작이 2014년 3월 간송문화전 1부 부터 2019년 3월 ‘대한콜랙숀’ 전시까지 5년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와의 협업을 통한 외부 기획전이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의 외부 기획전이 끝난 후 최근에는 2020년 여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던 ‘새 보물 납시었네, 신국보보물전 2017-2019’에도 소장품을 선보였다. 현재 성북동 간송미술관은 수장고 신축공사와 내부 복원공사로 인해 휴관 중이고 전시를 서울과 대구로 이원화하기 위해 대구 간송미술관을 설립 중이다.


● 마지막으로 - 우리 유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바라며

간송 전형필은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우리 문화를 지켰다. 그 뜻을 이어 간송미술문화재단은 소장하고 있는 문화유산을 정성스럽게 가꾸고 지켜나가고 있다. 간송미술관 말고도 국립중앙박물관, 리움미술관 등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고 있는 곳들이 많다. 고미술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도 많은 줄 알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고미술을 딱딱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애정과 관심 없이는 문화유산이 영원할 수 없다. 많은 고난을 이겨내고 우리 세대까지 소중한 유물을 전달해 준 분들께 감사함을 가지면서 우리 문화유산에 정성스러운 관심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우선 한적한 평일, 여유를 가지고 국립 중앙 박물관에 가보는 것을 추천하며 이 글을 마친다.

 

<사진 출처>

1. 청자상감운학문매병 © 간송미술문화재단 – 청자상감운학문매병

2.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 간송미술문화재단 –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3.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 간송미술문화재단 –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4. 훈민정음 © 간송미술문화재단 – 훈민정음

5. 촉자도권 © 간송미술문화재단 – 촉잔도권

6. 미인도 © 간송미술문화재단 – 미인도

    풍악내산총람 © 간송미술문화재단 – 풍악내산총람


<참고 자료>

김순지, 「[작가와 함께 살다간 사람들 4.간송 전형필] 암흑기의 한국문화 지킨 큰 인물」, 『미술세계』 1987년 2월호(통권 29호), 서울: 미술세계, 1987. 1.

백인산(간송미술관), 「간송이 지나온 길과 간송이 가야할 길」, 『미술세계』 2015년 12월호(통권 373호), 서울: 미술세계, 2015. 11.

이지영, 「빗장을 푼 간송미술관」, 『미술세계』 2014년 4월호(통권 353호), 서울: 미술세계, 2014. 3.

이충렬, 「’민족 문화유산의 수호신’ 간송 전형필의 삶」, 『미술세계』 2014년 4월호(통권 353호), 서울: 미술세계, 2014. 3.

“간송 전형필”, 간송미술문화재단, 2021년 4월 20일 접속, http://kansong.org/kansong/.

“간송미술관”, 간송미술문화재단, 2021년 4월 20일 접속, http://kansong.org/muse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