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과 전통 가훈(家訓)에 담긴 자식 교육

  • 518호
  • 기사입력 2023.06.28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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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 전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최근 우리사회에서 고위 공직자들이 자식들의 ‘학교폭력[줄여서 학폭]’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고 임용과 관련해 심각한 결격사유가 되는 일이 잦다. 학폭은 인성교육을 등한시한 채 입신양명만을 추구한 한국 학교 교육의 병폐 중 하나다. 학폭의 원인으로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지만 그 핵심적인 것 중의 하나가 잘못된 가정 교육이란 것을 들곤 한다. 이같은 학폭이 문제가 되는 이 시점에 과거 봉건사회의 다양한 가훈(家訓) 가운데 자식 교육이나 타인을 대할 때 요구한 것을 보되, 특히 이런 점을 흔히 ‘자식을 보면 그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말과 연계해 살펴보자.


2. 중국 역대의 유명 가훈


많은 왕조가 교체되고 아울러 다양한 전변(戰變)이 많았던 중국 역사에는 유명한 가훈이 많이 나온다. 중국 남북조 시대에 살았던 안지추(顔之推. 531~ 602)가 후손을 위해 남긴 교훈서에 해당하는 『안씨가훈(顔氏家訓)』을 비롯하여 당대 하동유씨(河東柳氏)의 「가훈」, 송대 사마광(司馬光)의 「가범(家範)」, 주희의 「주자가훈(朱子家訓)」, 원채(袁采)의 「원씨세범(袁氏世範)」, 원대 「정씨가범(程氏家範)」, 명대 방씨(龐氏) 집안의 「방씨가훈」 등이 유명하다. 이 가운데 『안씨가훈』은 자식 교육을 비롯하여 학문·교양·사상·생활양식과 태도, 처세와 교제방법·언어·잡예(雜藝) 등에 대해 구체적인 체험과 사례 등을 자세히 기록했다는 점에서 다른 가훈보다도 유명하다.


안지추는 『안씨가훈』 서두에서 “대저 성현이 남기신 글은 사람들에게 충성(忠誠)과 효도(孝道)를 가르치신 것이니, 말을 삼가고 몸가짐을 단속하여 한 몸을 내세우고 그 이름을 떨치라 하신 가르침 또한 이미 갖추고 있다. 내가 이제 다시금 이런 책을 짓는 까닭은 감히 사물에 법도(法度)를 세우고 세상에 모범(模範)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집안을 바로잡고 자손을 이끌고 타이르는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라고 했지만 이후 많은 인물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오늘날 학폭과 관련해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안지추가 『안씨가훈』 제일 첫 부분의 항목으로 ‘자식교육과 관련된 것[敎子]’을 기재한 것을 보면 안지추에게는 무엇보다도 자식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됐던 것 같다. 그럼 자식 교육 및 집안교육과 관련해 과거 동양에서 행해졌던 『안씨가훈』에 담긴 내용을 보자.


3. 『顔氏家訓』 「敎子」의 자식 교육


1) 幼兒 敎育의 중요성을 강조함.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이 있다. 교육을 잘못한 결과 교만해져 버린 자식의 문제점을 알고서 이제 늦게나마 회초리를 들고 버릇을 고치고자 한다. 하지만 안씨가훈에서는 하나의 고질적인 버릇이 되어버린 정황에서 부모가 의도하는 바대로 될 리가 없다는 점에서 유아 교육을 제일 먼저 거론한다.


교만이 이미 몸에 밴 다음 그제야 다시 버릇을 잡는다고 죽어라 회초리를 때린들 위엄도 서지 않고, 노여움을 날로 일으킨들 (아이들의) 원망만 쌓일 뿐이니 장성한 다음에는 마침내 패륜아가 되어버리고 만다. 공자가 말하기를 “어려서 이룬 것은 천성과 같으며, 습관은 타고난 것과 같다.”고 하셨으니 옳으시다. 속담에도 이르기를 “며느리는 갓 시집왔을 때 길들이고, 자식은 어릴 때 가르치라.”고 하였으니, 정말이로구나, 이 말이여!.


늦게나마 자식 교육의 잘못된 것을 안 부모의 자식에 대한 회초리와 노여움은 교육적 효과보다는 아이들의 원망의 대상이 되고, 이후 장성한 다음에는 결국 패륜아가 되어버린다는 안지추의 진단은 어릴 때 제대로 된 자식 교육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2) 부득이한 사랑의 매 : 자식 교육의 성공과 실패 사례

과거 ‘매를 아끼면 자식을 버린다’는 말이 있었다. 이에 안지추는 부득이하게 매를 대서라도 자식을 제대로 교육해야 함을 말한다.


평범한 사람으로 자식을 못 가르치는 부모일지라도 자식을 죄악에 빠뜨리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니, 다만 화를 내고 꾸짖어 자식의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기 난감하고, 차마 회초리로 매질을 하여 살갗을 참혹하게 만들 수 없을 뿐이다. 질병에 비유함이 마땅할 터이니, 어찌 탕약이며 침뜸을 쓰지 않고 사람을 구할 수 있겠는가? 또한 부지런히 보살피고 가르칠 것만 생각하는 부모가, 어찌 골육을 나눈 자식을 가혹하게 대하고 싶겠는가? 참으로 부득이하게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물론 부모의 자식에 대한 가혹한 매질은 자식 학대라는 문제가 있지만 과거에는 부모님이 자식을 올바른 인간으로 만들고자 한 사랑이 깃든 ‘부득이한 매질’이라면 용납된 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안지추는 매를 든 제대로 된 자식 교육의 실례를 거론하기도 한다.


(梁나라의〉 대사마 왕승변의 어머니 위부인은 성품이 매우 엄격하고도 단정하였다. 왕승변이 분성(湓城)에 있을 때 휘하에 3천 명을 거느린 장수로서 나이가 마흔이 넘었건만 조금이라도 〈어머니의〉 뜻에 어긋나기만 하면 어머니는 여전히 회초리를 들었으니, 이 때문에 그는 공훈을 이룰 수 있었다.


마흔이 넘은 자식이었지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머니가 회초리를 들었다는 것은 오늘날의 경우에는 접하기 힘든 정황이다. 성년이 된 자식의 잘못에 대한 어머니의 회초리는 올바른 자식교육의 상징에 해당한다고 본다. 실패한 자식 교육의 사례도 든다.


양원제(梁元帝) 때의 어떤 학사(學士)는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아버지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그 아버지는) 올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데에는 실패하였으니, 어쩌다 (그의 자식이) 옳은 말이라도 한마디 하면 낯선 사람들에게까지 두루 알리고 한 해가 다 가도록 자랑하다가, 어쩌다 (그의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면 이를 감추고 변명해주면서 스스로 고치기만 바랐다. 결혼하고 벼슬할 나이가 되자 포악하고 교만함이 날로 심해져 마침내 말을 가리지 않고 내뱉다가 주적(周逖)에게 창자가 뽑히고 피가 북에 발라졌다고 한다.


“어쩌다 (그의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면 이를 감추고 변명해주면서 스스로 고치기만 바랐다.”라고 하는 잘못된 자식 교육의 결과는 오늘날 학폭 대상자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런 점은 자식에 대한 편애와 일정 정도 관련이 있다고 본다.


3) 자식과 집안을 망치는 편애(偏愛)

부모라고 하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동일한 자식이라도 편애할 수 있다. 특히 못난 자식과 잘난 자식이 있을 경우에는 이런 점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잘난 자식을 편애했을 때의 문제점을 보자.


부모들이 자식을 사랑하나 (못난 자식까지도) 골고루 사랑할 수가 있었던 부모는 드물어서, 예로부터 지금껏 이로 인한 폐해들이 많았다. 똑똑하고 잘난 자식이야 자연스레 사랑을 베풀겠거니와, 어리석은 자식 역시 긍휼히 여겨 어여삐 해야 한다. 편애하게 되면 설사 그에게 두터운 사랑을 베풀고자 하였더라도 도리어 이것이 그를 재앙에 빠뜨리는 원인이 된다. 공숙단(共叔段)의 죽음은 어머니가 실로 그렇게 만든 것이며, 조왕(趙王)이 살육을 당한 것은 아버지가 실로 그리 되도록 시킨 셈이다. 유표(劉表)의 경우 집안이 기울어 멸족이 된 일이나, 원소(袁紹)의 경우 영토가 찢기고 군대가 패주한 일들은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잘난 자식에 대한 편애가 도리어 자식뿐만 아니라 집안 전체를 재앙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점을 역사적 실례를 들어 경고한 이글은 한 자식의 문제점이 한 개인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4. 나오는 말


이상 본 바와 같이 학폭은 학생 한 개인의 잘못된 일탈 행위 및 문제만이 아니고 부모의 자식에 대한 잘못된 교육, 애정 및 부적절한 관계가 총체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학 차원에서 볼 때 학폭은 ‘타인과 공존하면서 타인을 배려하고 아울러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측은지심[仁]’의 결여, 공동체 사회가 추구하는 정의로운 공공선 지향성[義]의 결여, 인간관계망에서 요구되는 절제된 이성적 행동양식[禮]의 결여, 어떤 판단이 옳고 그른 것을 제대로 판단하는 능력[知]가 결여된 결과물이다.

과거 종법제 및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 다양한 가훈의 가르침을 오늘날 변화된 삶의 방식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서 화해(和諧)로운 삶을 요구하는 데에는 과거 가훈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삶의 지혜를 준다고 할 수 있다. 학폭에 대한 반성적 고찰은 전통 가훈이 이 시대에 주는 긍정적인 의미를 되새김하게 하고 아울러 유가사상이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서 다시금 재해석되고 실천되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