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불아귀(法不阿貴)’ : 法家의 현대적 의의

  • 527호
  • 기사입력 2023.11.13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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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전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최근 우리 사회에 법 집행의 형평성 및 공정성과 관련해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법은 신분이 귀한 자(혹은 권력자)에게 아부하지 않는다’라는 ‘법불아귀(法不阿貴)’다. 이전[김수남]과 현직[이원석] 검찰총장의 취임사 일갈(一喝)도 바로 ‘법불아귀’였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취임사에서 “법 집행에는 예외도, 혜택도, 성역도 있을 수 없으며 검찰권은 오로지 증거와 법리에 따라 행사돼야만 한다”고 하면서 고대 중국 사상가인 한비자의 경구인 ‘법불아귀’를 인용했다고 한다.


법 적용의 형평성과 공정성을 상징하는 ‘법불아귀’를 강조한 인물은 제자백가 시대 법가를 대표하는 한비(韓非: 韓非子)다. 이같은 ‘법불아귀 정신’은 검찰이 존재하는 이유이면서 검찰이 지켜야 할 절대가치라고 말해진다. 그런데 노자(老子)가 말한 “나라가 어지러우니 충신이 생긴다[『老子』 18장: 國家昏亂,有忠臣]”라는 사유를 적용하여 본다면, 그동안 검찰이 ‘법불아귀’ 정신을 제대로 실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검찰총장 취임사에서 더욱 강조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 김수남 검찰총장 취임식과 이원석 검찰총장 취임식



2. 한비자 ‘법불아귀’의 형무등급(刑無等級) 원칙


흔히 동양의 마키아벨리[이탈리아어: Niccolò Machiavelli]로 일컬어지는 한비자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고 군주의 청정무위(淸靜無爲) 정치를 실현하는 방법론의 하나로 제기한 ‘법불아귀’는 군주를 위한 법의 실행이란 점에서는 일정 정도 제한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법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형평성과 공정성을 강조하는 이른바 ‘형무등급(刑無等級)’의 원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긍정적인 면이 있다. 먼저 한비자가 말한 ‘법불아귀’의 전후 맥락을 보자.


법은 ‘신분이 귀한 자[貴]’에게 아부하지 않고, 먹줄은 굽은 것에 휘어지지 않는다. 법이 시행되면 지혜로운 자도 이유를 붙일 수 없고, 용감한 자도 감히 다투지 못한다. 과오를 벌하는 것에는 대신도 피할 수 없으며, 선행을 상주는 것에는 필부도 빠트리지 않는다...형벌이 엄중하면 귀족이 천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못하며, 법이 자세하면 임금이 존중되고 침해받는 일이 없다. 그러나 군주가 만일 그것을 버리고 사사로움을 가지고 처리한다면 상하의 구별이 무너질 것이다.


법이 ‘형무등급’의 원칙을 지키면서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고 실행될 경우 얻을 수 있는 효용성은 많다. 이상과 같은 ‘법불아귀’ 정신을 실제 역사에 실행한 인물이 있다. 바로 진(晉) 효공(孝公)을 도와 이후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기반을 세웠다고 평가받는 법가 인물인 상앙(商鞅)이다.


‘자신이 만든 법에 죽음’을 당해 ‘작법자폐(作法自斃)’ 고사 주인공이기도 한 상앙은 왕족이나 관리, 백성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법률을 적용하고, 세금과 부역을 고르게 함으로써 진나라를 부국강병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다만 사마천(司馬遷)이 『사기』 「상앙열전」에서 ‘상앙은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잔인한 정치가’였다고 평가한 것처럼 상앙의 엄격한 법 집행은 많은 이의 반감을 사게 된다. 결과적으로 상앙은 죽은 이후지만 시체가 자신이 만든 거열형(車裂刑)을 당했고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된다.

법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상앙의 법사상과 법 집행은 형평성과 공정성이 담겨 있었다는 점에서 ‘법불아귀’를 찾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


商鞅 : 移木之信[혹은 徙木之信]


재상에 부임한 뒤 상앙은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는 원인이 나라에 대한 백성의 불신이라고 보고, 대궐 앞에 나무를 세우고 이 나무를 옮기는 사람에게 五十金을 하사한다는 방을 붙였지만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장난삼아 그 나무를 옮기자 재상이 약속한 대로 五十金을 하사하자 그 이후로 나라의 정책이 백성의 신뢰를 얻게 되었고, 진나라는 부국강병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다.


3. 법가가 역사에서 사라진 이유


그런데 한비자를 중심으로 하는 법가는 한대(漢代) 이후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런 점에서 반고(班固)가 쓴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 「제자략(諸子略)」에 나오는 법가에 대한 개략적인 평을 보자.


① 법가의 학파는 대개 ‘형벌을 관장하던 관리’로부터 나왔다. ‘잘한 일에는 상을 주고 잘못한 일에는 반드시 벌을 줌[信賞必罰]’으로써 예법의 제도를 도왔다. 『주역』 「서합괘(噬嗑卦)」에서 말하기를 ‘선왕은 (우레와 번개가 치는 것이 ‘서합괘’의 이치라는 것을) 운용하여 벌을 밝히고 법을 신칙(申飭)하였다’ 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법가의 장점이다.

② 하지만 각박한 자가 법을 집행하는 경우에는 교화를 무시하고 인자함과 자애로움을 버리며 오로지 가혹한 형법에만 맡겨 처리하였다. 이런 방식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고자 하였으니, 부모와 같은 지극히 친밀한 사람이 법을 어겼을 때 잔인하게 벌을 주어 해쳐 부모님에 대한 은혜를 손상하고 두터운 인정을 각박하게 만들었다.


①에서는 법가를 형성한 집단의 성격과 법가의 장점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있는데, ‘신상필벌’은 법가의 핵심에 속한다. ②에서는 법만능주의를 주장하는 법가가 갖는 문제점과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법가는 아무리 귀한 신분 예를 들면 고위 공직자는 물론 더 나아가 왕족이라도 법을 어기면 인정사정없이 가혹한 형벌로 다스렸다. 특히 부모가 죄를 범했을 때도 인정사정없이 법대로 처리하였는데, 이런 점은 혈연을 중시하고 가족이 궁극적으로는 국가를 이루는 이른바 ‘가국동구(家國同構)’를 지향하는 유가(儒家)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속한다. 『논어』를 보면 정직함에 관한 공자의 발언과 관련된 이른바 ‘직궁(直躬)설화’는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섭공(葉公)이 공자에게 말하였다. “우리 마을에 ‘정직한 궁[直躬]’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그 사실을 관청에 고발하였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감싸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감싸주는데, 정직함은 바로 그 속에 있습니다.”


직궁의 이같은 행위는 군주에게 정직한 신하는 아버지에게는 포악한 자식이고, 아버지에게 효자는 군주에게는 배신자라는 논리로 전개된다. 공자가 아버지가 양을 훔쳤을 때 ‘숨겨 주겠다[隱]’라고 말한 것은 법가가 지향하는 법만능주의와 거리가 멀다.

오늘날 ‘판사와 검사’ 등과 같이 형벌을 관장하던 관리에서부터 탄생한 법가는 ‘신상필벌’의 원칙을 지키면서 공정한 법 집행과 형평성을 시도한 것은 장점에 해당한다. 하지만 인간 세상이 법으로만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인애(仁愛)와 효도(孝道)를 강조하고 유가(儒家) 이데올로기를 통해 통치에 임한 한대(漢代) 이후에는 법가가 설 자리는 없어진다.


서양 속담에 ‘예외없는 원칙은 없다[There is no rule but has exceptions]’는 말이 있다. 오늘날 친고죄(親告罪)를 인정하거나 집행유예 판단을 내리는 것은 법가에게는 용납될 수 없었다. 법가는 너무 가혹하고 각박했다.


4. 나오는 말


한비자가 강조하는 ‘법불아귀’ 정신과 ‘군주가 법을 사사로이 운용하는 것’에 대한 경계의 말은 ‘유전무죄, 무전유죄’, ‘유권(權[권력])무죄, 무권유죄’ 더 나아가 ‘유검[檢(檢察)]무죄, 무검유죄’라는 말이 회자되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검찰의 선택적 기소와 수사를 일삼는 행위에 대해서는 더욱 시사하는 바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