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士]’ 용어를 통해 본 동양문화

  • 533호
  • 기사입력 2024.02.15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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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전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과거 봉건사회에서 신분적으로 ‘천자[왕] · 제후 · 대부 · 사 · 서인’으로 구분되었던 ‘사’는 흔히 ‘유가의 선비’를 통칭하는 것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중국 고전에 나타난 ‘사’ 자의 용례를 보면 유학의 선비로 말해지는 이른바 ‘유사(儒士)’[지역과 연계하여 말하면 공자와 맹자와 관련이 있는 鄒魯之士] 이외에 지사(志士), 의사(義士), 은사(隱士), 도사(道士), 방사(方士), 술사(術士), 협사(俠士), 무사(武士), 거사(居士) 등 다른 용례로 사용된 예가 많다. 노자(老子)는 도의 체득 단계에 따라 상사, 중사, 하사로 구분한다.


상급 선비는 도를 들으면 (도가 무엇인지를 알기에) 힘써서 행하고, 중급 선비는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하고,  하급 선비는 도를 들으면 (말도 안되는 소리라 여기고) 크게 비웃는다. (하급 선비가 크게 비웃지 않는다면) 도가 될 수 없다.


‘(하급 선비가 크게 비웃지 않는다면) 도가 될 수 없다’는 말은 이후 참된 진리는 비웃음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욱 진가가 드러난다는 역설적인 말로 사용된다. 위진(魏晉) 시대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대표되는 ‘명사’는 오늘날에도 자주 쓰인다. 이같은 사는 남성에게만 적용된 것은 아니었고 여성에게도 적용되었다.


2.  천하를 책임진 남성상으로서 ‘사(士)’


동양고전을 보면 신분, 인물의 성격, 행동거지, 지향하는 세계관의 다름에 따라 ‘사’에 대한 다양한 구분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비자(韓非子)가 ‘경전지사(耕戰之士)’를 거론하듯이 ‘사’는 전쟁 시에는 무사로도 활약하였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오의해(五儀解)」에서 공자는 인간을 현우(賢愚)와 의법(儀法)을 통해 ‘용인(庸人), 사, 군자, 현인, 대성(大聖)’ 등 다섯가지로 분류하는데, ‘사’는 군자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특징이 있다. 바로 ‘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수치스러움을 느낀다는 것과 부귀와 빈천 때문에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관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진 왼쪽) 岳陽樓(악양누) : 중국 후난성 岳陽에 있는 중국 4대 名樓 중 하나. 范仲淹(범중엄)의 「岳陽樓記」가 탄생한 곳.

(사진 오른쪽)范仲淹 초상. 북송의 정치가, 군사가, 탁월한 문학가, 교육가인 범중엄의 자는 희문(希文), 시호는 문정(文正). 유가 선비상을 확립한다.


‘사’에 관해 공자는 자공(子貢)에게 “사는 자신의 행동에 염치가 있다”라는 염치의 덕목을, 자장(子張)은 “선비가 위태로움을 당하여서는 생명을 바치고, 이익을 얻게 될 때에는 의로움을 생각한다”라는 의로움의 덕목을 말한다. 하이라이트는 증자(曾子)다. 증자는 “선비는 모름지기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어야 할 것이니, 그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仁)으로써 자기 임무를 삼았으니 어찌 무겁지 않으랴. 죽은 뒤에야 그칠 것이니 또한 멀지 않으랴”라고 하여 ‘임중도원(任重道遠)’과 상관된 인(仁)의 덕목을 강조한다.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후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라고 말한 북송대 범중엄(范仲淹)을 평가할 때 사용된 말인 “천하의 일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야 한다[以天下爲己任]라는 “숙세정신(淑世精神)”은 송대 이후 이른바 ‘선비[士]’ 사명감의 핵심이었고, 이후 ‘사’하면  ‘유가의 선비[士]’로 각인되기 시작한다. 왜 명나라가 망했는 가를 고민했던 명말청초의 고염무(顧炎武)가 “천하의 흥망은 필부[모든 남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라고 하면서 필부에게도 천하 흥망의 책임을 지운 사유는 ‘사’의 사명감을 더욱 부추겼다.  


이상 본 바와  같이 유가사상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확립한 ‘사’는 송대 이후 천하를 책임지는 역할이 주어지는데, 이런 선비상은 중국보다는 특히 조선조 유학자들이 지향한 선비상으로 굳어졌다.


(사진 왼쪽) 유관순(柳寬順) 열사: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사진 오른쪽)추근(秋瑾). 청나라 光緖帝 때의 혁명가이자, 여성운동가. 刀劍 애호가이고 여성의 몸으로 혁명가로 활동했던 추근의 처형은 당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고, 그 후 추근은 중국 혁명운동의 정신적인 지주가 된다.



3. 선비 행실이 있는 여자 선비: ‘여사(女士)’


과거 동양문명권에서는 여성에게도 선비의 행실을 요구하였고 이런 점은 ‘여사’라는 특화된 용어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영어의 “Ladies and gentlemen”을 중국어로는 “女士們先們”으로 번역하는 것처럼 이전과 달리 오늘날 여사라는 용어는 다양하게 사용된다. 조선조에 초점을 맞추면, 과거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의 ‘여사’는 주로 결혼한 여성이 문중과 가정을 위한 바람직한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 논해진다. ‘여사’라는 용어는 『시경(詩經)』 「대아(大雅)·기취(旣醉)」라는 시에 나온다.


“군자에게 만년토록 하늘이 짝을 주네. 그 짝은 어떤 짝, 너에게 ‘선비의 행실’이 있는 훌륭한 짝을 주셨네. 너에게 ‘선비의 행실’이 있는 훌륭한 짝을 주시니, 자손 낳아 뒤를 잇네[君子萬年, 景命有僕. 其僕維何, 釐爾女士. 釐爾女士, 從以孫子.]”


주희(朱熹)는 여사에 대해 “여자에게 선비의 행실이 있는 자다[女之有士行者].”라고 주석한다. ‘사행(士行)’으로 규정된 군자의 짝이 되는 여사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조선조에서 여사라고 일컬어진 여성들의 행동거지를 통해 살펴보자.


숙모는 자애롭고 은혜로우며 정숙하고 온순한 것이 천성인 데다가, 어려서 우리 외조모 최부인(崔夫人)과 우리 어머니의 교훈을 받아 사덕(四德)을 두루 갖추었기에 여사의 풍모가 있었다. 위로는 어른을 받들고 아래로는 집안일을 다스리며 제수(祭需)를 올리는 것과 주식(酒食)을 마련하는 일에 각각 그 도리를 다하여,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모두 모범이 되었다.


아, 시집가기 전에는 부모가 그 효성을 칭찬하였고, 시집간 뒤에는 시부모가 그 성심을 칭찬하였다. 남편을 섬기는 데는 공경하면서도 경계하는 말을 하였고, 자녀를 훈육하는 데에는 사랑하면서도 엄숙하게 하였다. 도리(道理)의 대체(大體)를 통달한 데에 이르러서는 또한 글을 읽은 군자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아, 어찌 옛날의 이른바 여사가 아니겠는가.


여사의 바람직한 풍모로 거론되는 ‘사덕’은 부녀자가 지켜야 할 부덕(婦德), 부언(婦言), 부공(婦功), 부용(婦容) 등 네가지 덕목이다. 사덕을 행하려면 익혀야 할 기준이 되는 텍스트도 있다. 예컨대 『예기』「내칙(內則)」, 『열녀전(列女傳)』, 『내훈(內訓)』 등이 그것이다.


몸가짐을 닦는 데에 미쳐서는 반드시 『예기』「내칙」과 『열녀전』을 따라 행동거지가 고요하고 바르며 사기(辭氣)가 온화하여 부모가 사랑하고 친척들이 여사라고 일컬었다.


『內訓』. 조선조 성종의 어머니인 仁粹大妃가 저술한 여성용 수신 교양서. ‘여자가 권력의 중심에 있어서는 안 되고’,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라 강조하는 것에는 과거 전통적인 유교적 여성관이 담겨 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긍정적인 면도 있다.


이상과 같이 규정한 여사와 관련된 구체적인 행동거지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아아, 훌륭했던 우리 누님은, 옛날로 말하자면 여선비였지. 유순하고 정숙하고 반듯하였지, 근검하며 말 삼가고 민첩한 데다, 식견 높고 행실도 고상했다네.


순후하고 곧은 마음을 속에 지니고 올바른 행실이 밖으로 드러나며, 정숙하고 전일하면서도 온화하며, 단정하고 은혜로우면서 엄숙하며, 음식 마련도 잘하여 시부모님께 공경하기를 의인같이 한 여인은 세상에 흔히 볼 수 없으니 어찌 이른바 여사가 아니겠습니까.


여사로 일컬어지려면 여성으로서 지켜야할 예법을 지키면서 성품의 온화함, 은혜로움, 정숙함, 신중함, 유순함, 선량함, 현숙함, 명철함 등을 고루 갖추어야 한다. 현모양처 조건은 기본이다. 이상 말한 것에 한걸음 더 나아가 사리 분별이 뚜렷하고 ‘무당과 미신에 현혹되지 않는 것’을 여사의 풍모와 연계하여 이해하기도 한다.


숙인은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삼가서 항상 말씀하기를, “만약 조금이라도 삼가지 않으면 자기를 낳아 준 부모를 욕되게 하니, 이는 죄악이다.” 하였다. 그리고 남의 불선을 보면 반드시 준엄하게 배척하고 용서하지 않았다. 어짊과 간사함, 옳고 그름의 구별에 있어 매우 엄격히 분별하였으며, 무당과 미신에 현혹되지 아니하여 훌륭한 여사의 풍모가 있었다.


이상 본 바와 타인들에게 여사라는 호칭을 얻으려면 충족시켜야 할 조건이 매우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신분의 고하는 크게 상관없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물론 과거의 이같은 여사상은 과거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요구된 여성상이란 점에서 오늘날의 양성 평등관점에서 보면 문제점도 많다고 본다.


4. 나오는 말


지금은 남의 부인을 높이는 일상화된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과거 대통령 부인과 자식들을 영부인(令夫人), 영식(令息), 영애(令愛)라고 호칭한 적이 있었다. 『시경』에는 영덕(令德), 영문(令聞), 영종(令終), 영의(令儀), 영색(令色)이란 용어가 나오는데, ‘영(令)’자를 ‘착할 선[善]자’로 풀이한다. ‘착하다’는 말에는 남에게 존경을 받는 윤리적 차원의 고아하면서도 경박하지 않는 행동거지 및 풍부한 학식이 자연스럽게 체화(體化)된 인품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남자 선비의 행실이 여성에게 적용된 ‘여사’라는 호칭에도 당연히 이같은 사유가 적용되고, ‘착한 부인’이란 ‘영부인(令夫人)’이란 호칭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유에는 유학의 정명론(正名論)에 입각한 ‘~다움’이란 철학이 담겨 있다.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아들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는 이른바 정명론(正名論)에 입각해 군주, 신하, 아버지, 자식의 자격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주역』 「(風火) 가인괘(家人卦)」에는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답고, 형은 형답고, 아우는 아우답고, 남편은 남편답고, 아내는 아내다와야 하니, 집안의 도리가 바르면 세상이 안정된다[父父子子, 兄兄弟弟, 夫夫婦婦, 家道正, 天下定矣.]”라는 말도 나온다.


이처럼 과거 유가 정명론의 입장에서  ‘~~다움’을 통해 군신, 부자, 부부, 형제 관계에서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가를 논한 것은 남성상으로서의 ‘사’와 여성상으로서의 ‘여사’ 모두에게 적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