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孝)’란 무엇인가 (Ⅱ)

  • 484호
  • 기사입력 2022.02.03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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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실제 있었던 사건이다. 과거 전라북도 모 시에서 국회의원 출마자가 불효자로 소문이 나서 당연히 당선될 것으로 알았던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격적으로 패배한 사례가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효 관념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 하나의 사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효의 ‘사친’을 충의 ‘사군’으로 연결하는 사유에는 봉건 종법제(宗法制) 하에서 형성된 ‘집과 나라는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가국동구(家國同構)]’ 혹은 가국동체(家國同體) 의식과 더불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이루는데 효가 갖는 정치적, 교육적 효용성이 지대하다는 사유가 동시에 담겨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대 ‘효문제(孝文帝)’처럼 효가 갖는 영향력을 간파한 황제들이 자신들을 일컬을 때 ‘효’ 글자를 붙인 것도 효와 충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이제 시대를 거듭할수록 효는 단순 개인의 윤리적 행동 양식에만 머무르지 않고 확장되어 국가의 안정과 화평을 이루게 하는 정치 기제가 된다. 유가에서 대효(大孝)를 실천한 순(舜)임금을 위대한 인물로 찬양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5.

과거 봉건사회에서는 종법제도와 가국동구·가국동체 등의 사유를 통해 천자부터 서인(庶人)까지를 하나의 통일체로 이해하면서 각각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하면 서로 간에 갈등 없이 조화를 이루고 살 것인지를 고민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기된 대표적인 사유가 바로 효다. 효는 단순한 개인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군주에까지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봉건사회에서 예법이 갖는 것과 동일한 차원의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개인적 차원의 ‘사친(事親)’은 정치적 차원의 ‘사군(事君)’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됨에 따라 효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이루는 핵심개념으로 자리잡히게 된다.


유가가 제시한 다양한 차원의 효를 실천했을 때 나타난 효용성은 종교적 측면, 윤리적 측면, 정치적 측면, 교육적 측면 등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모든 부분에 적용되었고, 이에 유가의 효 이념은 개인과 국가 모두에게 적용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런 점에서 유가의 효 관념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봉건사회를 이해하는 핵심이 되는데, 특히 제왕의 효가 강조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제왕의 효는 일반 백성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그 결과 제왕의 효 여부는 바로 치국평천하 여부와 관련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에 효의 핵심을 이루는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고 부모님을 섬기는 것[양지(養志)]’과 대비되는 ‘부모에게 음식물을 줌으로써 부모를 봉양하는 것[능양(能養)]’을 구분을 짓고 아울러 ‘대효(大孝)’, ‘중효(中孝)’, ‘소효(小孝)’ 및 ‘달효(達孝)’ 등과 같이 효에 대한 다양한 층차가 나타났다.


과거 정착된 농경사회에서 형성된 조상숭배와 혈연의 연속성 강조 및 종법제도 하의 가국동구·가국동체 관념에서 형성된 효 관념은 한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국가사회의 안정과 화목을 추구하는데 긍정적 영향을 끼친 점이 있다. 이런 효 관념에는 유가가 지향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이 담겨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효는 기본적으로 부모가 평소 지향한 뜻과 마음을 존숭하며 따르는 것이면서 아울러 부모님이 잘난 자식을 낳았다는 자랑거리와 즐거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아울러 부모를 욕되게 하거나 위태롭게 해서는 안된다. 부모에 대한 ‘양지(養志)’를 강조하면서 공경함이 수반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음식 봉양을 문제삼는 것은 효행에서의 공경함이 갖는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구체적 실천과 관련된 효의 행위는 모두 예에 맞아야 하였다. 유가가 강조한 효와 ‘불효(不孝)’ 및 ‘비효(非孝)’는 살아있는 부모와 돌아가신 부모에 모두 적용되었다. 불효와 비효 사유는 그만큼 참된 효를 실천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점은 천자로부터 서인들에까지 모두 적용되었는데, 그 바탕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이루는데 효가 강력한 기제로 작동하였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이런 사유는 천자나 한 개인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선왕 및 부모라는 존재와 연계하여 이해된다는 점에서 이른바 ‘집단 속의 개인’이란 점도 보여준다.


유가는 효는 여러 층차로 나뉘어 이해하였다. 어떤 내용으로 실천했느냐에 따라 ‘대효’, ‘중효’, ‘하효’로 구분되었다. 순(舜)의 효는 ‘대효’,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의 효는 ‘달효(達孝)’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효에 대한 차별화된 의미를 부여하였다. 효에 관한 다양한 사유 중에 ‘삼불효(三不孝)’를 말하면서 가운데 ‘후사(後嗣)를 이어가지 못하는 것[無後]’을 가장 큰 불효라고 여긴 것에는 가부장적 차원에서 혈연의 연속성을 중시한다는 사유가 담겨 있다. 사친의 효를 사군의 충으로 연결한 사유는 가국동체에 의한 종법제도가 작동한 결과로서, 부모에 대한 효라도 제왕이 행하는 효와 일반 백성들이 행하는 효는 달랐다. 이 경우 제왕이 행하는 효행은 단순 제왕 그 자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하 백성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런 점에서 유가에서는 제왕의 효가 갖는 치국·평천하의 효용성을 강조하였다.


이상 살펴본 다양한 차원의 효를 실천했을 때 나타난 효용성은 종교적 측면, 윤리적 측면, 정치적 측면, 교육적 측면 등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모든 부분에 적용되었고, 이에 유가의 효 이념은 개인과 국가 모두에게 적용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결국 효를 강조한다는 것은 종법적 동형(同型)구조체에서 출발하여 전통적인 덕치(德治) 이외의 효치(孝治)를 대일통(大一統)을 이루고자 하는 사유가 담겨 있고, 이같은 효관념을 이해하는 것은 종법적 동형구조체의 봉건사회를 이해하는 핵심임을 알 수 있다.


6.

이상 거론한 이런 효의 핵심을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한 것은 『효경』일 것이다. 『효경』에는 천자, 제후, 경대부, 사, 서인 등과 같이 서로 다른 신분들이 행하는 효의 구체적인 내용을 기술하고 있어 효가 단순 하나의 가정사에만 적용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데, 이같은 효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무릇 효는 덕의 근본이요, 가르침의 발생 근거이다...몸, 터럭, 살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 감히 훼상하지 않음이 효의 시작이요, 몸을 세워 도리를 행하여 이름을 후세에 드날려서 부모를 나타내는 것이 효의 마침이다. 대저 효는 어버이를 섬김이 시작이요 임금을 섬김이 가운데요 몸을 세움이 마침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언급 중에서 주목할 것은 ‘사친(事親)’의 효가 ‘사군(事君)’의 충으로 연결된다는 점과 개인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이 개인을 넘어서 그 개인이 속한 집단[상징적으로 아버지]의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몸[遺體]’를 온전히 보전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부모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는 차원에서의 효다.


이런 효도는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는 효다. 하지만 자식의 입신양명은 좀더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다. 자식이 입신양명을 실천하면 살아계신 부모님의 뜻을 제대로 받든 것이 되고, 이런 것은 부모님을 즐겁게 만들고 사회적으로 자랑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줌과 동시에 돌아가신 조상에게도 부모님은 떳떳한 후손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한다. 따라서 효를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입신양명은 효의 핵심에 속한다. 부자간의 천륜을 끊어버리라고 하는 불교에서도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통해 효를 강조하는 아이러니는 그만큼 유가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효가 중요함을 보여주는 또다른 예다. 『삼강행실도』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도 효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삼강행실효자도(三綱行實孝子圖)』

조선조에서 만든 『삼강행실효자도(三綱行實孝子圖)』 에는 ‘虞舜大孝’을 비롯하여 역대 효자 110명을 소개하고 있다.



7.

이제 이상 거론한 과거 정착된 농경사회 및 가부장적 종법제 하에서의 형성된 효 관념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오늘날의 현실에 비추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은 효 관념이 형성된 과거 정착된 농경사회 삶에서 많이 벗어나 있고 아울러 종법제도 하에서 살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조선조 ‘석진단지(石珎斷指)’로 유명한 효행도 이제는 국가에서 다양한 의료 제도를 통해 일정 정도 해결하고 있는 정황이다. 하지만 효에 대한 관념은 여전히 우리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제 이전과 다른 사회구조 속에서 사는 오늘날 상황에서 유가에서 강조한 효 관념 중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실현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 <石珎斷指>, 조선 18세기, 21.7×14.7㎝, 삼성미술관 Leeum

‘石珎斷指’는 효행의 대표적인 예로서 종종 거론된다. 조선 세종 때 전라도 고산현의 서리 유석진의 아버지 유천을이 악질로 심하게 고생을 했는데, 어느날 어떤 사람이 “산 사람의 뼈를 피에 타서 마시면 나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말을 들은 유석진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잘라 말대로 하자 아버지가 그 효성에 감응되어 곧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이다[兪石珎, 高山縣吏也. 父天乙得惡疾, 每日一發, 發則氣絶, 人不忍見. 石珎日夜侍側無懈, 號泣于天, 廣求醫藥. 人言生人之骨, 和血而飮則可愈. 石珎卽斷左手無名指, 依言以進, 其病卽瘳.]. 위는 부모가 아파서 누워 계신 정황을 그린 것이고, 아래는 다른 방에서 석진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