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문인의 예술론과 구별짓기[Distinction] Ⅰ

  • 471호
  • 기사입력 2021.07.12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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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 동아시아학과 교수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이후 과천에 살던 어느 날 ‘우연히 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생겨[偶然欲畵]’ 난을 친 뒤 다음과 같은 화제를 남긴다.


“초서, 예서, 기자를 쓰는 법으로 그렸으니, (이 그림의 의미를)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겠으며, 어찌 좋아하겠는가?”

[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세한도〉와 더불어 김정희의 회화작품을 대표하는 〈不二禪蘭圖[혹은 不作蘭圖]〉에 남긴 이상과 같은 발언에는 김정희의 오만함, 자신만만함과 더불어 타인과 다른 미의식 및 취향의 차별성이 담겨 있다. 김정희는 서화 예술을 ‘군자의 예술’로 자리매김하고, 아울러 유가의 ‘격물치지(格物致知)’ 학문공부와 연계하여 서화 예술의 격을 최고로 높인다. 아울러 ‘서예의 법[書法]’과 ‘시의 품격[詩品]’ 및 ‘그림의 정수[畵髓]’의 묘경은 동일하다는 사유에서 출발하여 예술창작과 별로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통해 청고고아(淸高古雅)함을 표현할 것을 강조한다. 이처럼 학식, 인품, 신분 등과 연계된 ‘군자의 품격에 맞는 예술’을 강조하면서 기교의 공졸(工拙)을 따지지 않고 형사(形似) 측면의 ‘의양(依樣)의 미’를 표현하는 이른바 ‘화장(畵匠)’과 ‘서장(書匠)’ 풍의 예술창작을 지양(止揚하)는 김정희의 예술론에는 구별짓기[Distinction] 사유가 담겨 있다.


           [김정희의 불이선란도]

 김정희가 20년 동안 난을 치지 않다가 우연히 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 난을 친 다음 왜 이런 난을 쳤는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얻은 결론은 ‘본성에 담긴 진정한 자신의 본모습[性中天]’을 그리고자 한 것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런 점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면서 서예[초서, 예서, 기자]의 기법을 통해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그린 ‘이서입화[以書入畵]’의 기법과 그려진 형상에 담긴 의미를 타인들이 어찌 알 수 있을까 하는 오만한 발언을 통해 타인과의 구별짓기를 강조했다. 김정희에게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전통적으로 군자가 풍상(風霜)을 겪은 것은 탄은(灘隱) 이정(李霆)의 〈풍죽도(風竹圖)〉가 상징하듯 대나무[竹]를 통해 표현한다. 하지만 김정희는 풍상의 형상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화목(畵目) 구성에서 벗어나 난을 통해 표현한다. 예술적 창의성과 천재성이 보이는 작품이다. 


동양회화사에서 이같은 드라마틱한 난의 형상을 통해 이른바 풍란(風蘭)을 표현한 것은 김정희가 처음 아닌가 한다. 김정희가 ‘우아한 오만함’을 드러낼 만한 작품이다.



              [이정의 풍죽도]

5만원권 화폐의 도안으로도 사용되고 있는 이 작품은 전형적인 〈풍죽도〉에 해당한다. 북서쪽에서 불어는 숙살지기(肅殺之氣)가 담긴 강력한 바람에 휜 농묵(濃墨)의 대나무와 그 바람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담묵(淡墨)의 대나무 형상을 통해 군자의 두가지 삶을 그리고 있다.


[이 글에서는 제한적으로 중국과 한국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예술에서는 김정희가 ‘군자의 예술론’을 강조하고 있지만 송대 이후는 대부분 문인계층이 문화와 예술을 주도하는 특징을 보인다. 동양문화에서 문인은 단순히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유덕자이면서 글을 쓰는 인물을 문인이라고 여겼다. 『논형(論衡)』을 지은 한대 왕충(王充)은 상주문으로 논설을 펼치는 인물을 문인이라 하면서, 공자도 주(周)나라의 문인이었다고 한다. 


유덕자로서의 문인은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점차 세속화, 일반화 현상이 일어난다. 명말청초 고염무(顧炎武)는 당송(唐宋) 이후에 문인이 많아짐에 따라 경술을 알지 못하고 고금을 통달하지 못하는 문인 즉 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문인이 나타났음을 지적한다. 


이처럼 명청 시대에 접어들어 문인의 질적 차원에 문제점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문인은 기본적으로 일반 서민들과 차별화된 계층에 속한다. 현대신유학자라고 평가받는 당군의(唐君毅)는 중국의 전통문인을 두종류로 구분한다. 유가의 인문정신에 감화되어 성정이 돈독하면서 기상(氣象)과 풍골(風骨)이 뛰어난 ‘고전문인(古典文人)’과 도가의 ‘도법자연(道法自然)’ 정신에 감화되어 의취(意趣)가 쇄락(灑落)하고 뛰어난 운미(韻味)를 보인 ‘낭만문인(浪漫文人)’으로 구분한다. 


이런 두 종류의 문인들에 의해 동양의 문예와 예술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펼칠 수 있었는데, 그것에는 구별짓기 사유가 작동하고 있었다.


흔히 문인사대부라고 하는데, 문인과 사(士)는 다르다. 시인이면서 서예가로도 유명한 조조(曹操)[=魏武帝]는 환관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사로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조조와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문인은 사에 속한다. 이에 문인아사(文人雅士), 문인운사(文人韻士), 문인청사(文人淸士), 문인일사(文人逸士), 문인정사(文人貞士) 등과 같은 표현을 통해 문인과 사를 동시에 거론하곤 한다. 이같은 표현에서 ‘雅’, ‘韻’, ‘淸’, ‘逸’, ‘貞’과 같은 용어를 통해 사를 규정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송대 오면 사는 천자와 함께 천하를 책임진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임하였지만, 예술적 측면에서 거론된 사의 경우 아, 운, 청, 일, 정과 같은 용어가 그 사의 성격을 규정짓게 된다. 이런 규정에는 일반론 차원의 사와 다른 은일(隱逸) 혹은 탈속(脫俗)적 삶을 추구하는 ‘예술화 경향’이 강한 사라는 차원의 이른바 ‘구별짓기’ 사유가 작동하고 있다.


공자는 육예(六藝)를 습득한 인물을 군자로 규정한 적이 있는데, 이후 윤리도덕적 차원에서 이해된 군자를 비롯하여 문인이란 용어는 ‘뭇 서인[衆庶]’ 혹은 평민 등으로 말해지는 비문화적인 계층과 차별화된 의미를 지닌다. 예술 차원에서 볼 때, 이같은 사유의 싹은 이미 명대 동기창(董其昌)이 문인화와 화원화를 구분한 것에 나타나는데, 동양예술에 나타난 구별짓기 사유는 대부분 회화, 서예, 다도, 음악 등 이른바 문인들이 ‘우아함[雅]’를 추구하고자 한 예술행위, 취향의 다름을 통해 적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동양예술에서의 구별짓기 사유에는 다양한 철학적 사유와 논의가 담겨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조(曹操)의 단가행]

뛰어난 시인이면서 서예가였던 조조가 읊은 〈단가행〉의 앞구절이다. 조조는 환관의 양자로서 사(士)가 아닌 것이 평생의 콤플렉스(complex)로 작동한다. “술을 들면 당연히 노래를 불러야지,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살다보니 많은 근심걱정거리가 있는데, 이 근심걱정을 해결해줄 것은 술[杜康] 뿐이구나[對酒當歌, 人生幾何, 譬如朝露, 去日苦多, 慨當以慷, 憂思難忘, 何以解憂, 唯有杜康]”는 시구는 중국문예사에서 호방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구로 평가받고 있다. 건륭황제의 인장[古希天子] 등이 찍혀 있지만 조잡한 것이 진품은 아닌 것 같다.


현대 프랑스 사회학자인 삐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제1부 「취향에 대한 사회적 비판」 부분에서 문화귀족은 원래의 귀족과 마찬가지로 나면서 얻은 탁월성을 통해 남들과 구별되고, 아울러 예술적 정통성을 독점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취향은 칸트가 말하듯이 차별화하고 평가하는 일종의 획득된 성향으로서, 이런 취향은 차별화 과정을 통해 차이를 만들어낸다. 동양 미학과 문화 방면에서 ‘취향[趣]’의 심미 특징에 대한 정체성은 예술적이면서 철학적인 ‘흥취(興趣)’, ‘이취(理趣)’, ‘천취(天趣)’ 등의 특징을 규명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원대 원굉도(袁宏道)는 세상 사람들이 얻기 어려운 것을 취라고 규정한다. 아울러 취는 산색이나 물맛, 혹은 꽃이나 여인의 자태와 같은 것으로 아무리 말을 잘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기 어렵고 오직 ‘마음으로 이해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하여 특화된 의미를 부여한다.


삐에르 부르디외는 취향에 대해 사회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개인에게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분포구조를 실천적으로 통제하는 능력인데, 그것은 일종의 사회적 방향감각[자신의 자리에 대한 감각]으로 기능한다고 한다. 아울러 취향은 사회 공간내에서 그들이 배치될 경우, 상품과 제 집단들간의 대응 관계에 대해 다른 행위자들이 갖고 있는 실천적 지식이 주어졌을 경우, 선택된 실천과 대상에 대한 사회적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실천적 예측을 암시한다고 규정한다. 이같은 사회학적 차원에서 삐에르 부르디외가 제기한 구별짓기와 취향에 대한 견해가 동양문인들이 추구한 삶과 예술에서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문인들이 예술창작과 관련하여 요구하는 것은 매우 많다. 선비 기운[士氣]를 담아낼 것, 고상함과 우아함을 드러내고 속기를 배제하는 것, ‘독만권서(讀萬卷書)’로 상징되는 많은 독서량을 요구하는 것, 예술가에게 기교보다는 학문의 습득과 깊이 여부를 따지는 것, 인품의 고하를 따지는 것, 인품을 선천적 생득(生得)의 기운과 연계하여 이해하는 것, 탈속 지향의 은일적 삶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 색의 경우 ‘존천리(存天理), 거인욕(去人欲)’의 상징적 기물인 백자로 상징되는 백색을 숭상하는 것- 특히 조선조는 백자의 경우 왕실의 기물로서 신분 차별의 의미가 매우 강했던 기물이었다- , 향의 경우 난향(蘭香)을 최고로 여기는 것, 맛의 경우 담박함을 강조하는 것, 때론 바름과 평상으로 이해되는 정(正)보다는 광기 혹은 기이함[奇]을 추구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런 많은 요구사항에는 모두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적 품격과 취향이 타인과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이른바 구별짓기 의식이 담겨 있다. 이런 점은 보다 구체적으로 개인과 집단에서의 구별짓기 형태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