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easy but fair<br> 토마스존 교수

I'm not easy but fair
토마스존 교수

  • 348호
  • 기사입력 2016.05.27
  • 취재 이서영 기자
  • 편집 강지하 기자
  • 조회수 13977

이번호에는 주변 친구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토마스 존 교수를 인터뷰했다. 그는 우리 학교에서 시사영어, 비즈니스영어, 영어쓰기, 영어발표 수업을 하고 있다. 올해 한국생활 25년차.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을 시간인데 그에게 한국과 성균관대학교는 어떤 곳일까.

“저는 태어났을 때부터 교수가 될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제 여동생, 아버지, 할아버지를 포함한 제 가족 대부분이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어요. 심지어 삼촌까지도요. 제가 교수가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물론 어렸을 때는 다른 직업을 꿈꾸기도 했어요. 경영과 관련된 일을 하려고 했었죠. 저는 우리 가족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고 싶었어요. 한국에 온 이유도 가족 내에 모든 사람들이 미국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한국에 오고 나서 결국 가족의 전통을 따라 선생이 되기로 했어요. 저는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게 좋아요. 교수라는 직업은 제가 누군가를 가르칠 기회를 주는 직업이었죠. 재미있는 점은 제가 한국을 선택한 이유가 ‘세종대왕’이라는 거에요. 저는 유학을 배우고 싶어서 아시아인 친구들에게 찾아가서 그들의 언어에 대해 물어보았어요. 중국인 친구에게 가서 중국어를 쓰고 있는 것을 봤는데 어려워 보였어요. 그래서 일본인 친구에게 갔죠. 일본어 배우기가 어려운지 물어봤더니 어떤 알파벳을 배우고 싶은지 저에게 물어보더군요. 저는 알파벳이 한 개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 포기했죠. 그리고 나서 한국인 친구에게 갔어요. 저는 한 시간 만에 제 이름을 한글로 쓸 수 있었어요. 그리고 한국에 오게 되었죠. 세종대왕님께 감사드려요. (웃음) 성균관대학교에 온지 벌써 8년쯤 됐어요.”

“저는 시사영어, 비즈니스영어, 영어쓰기, 영어발표 수업을 통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지만 한국 야구에 대한 수업도 진행하고 있어요. 저는 야구를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그 수업이 좋아요. 그러나 가장 선호하는 수업이라고 하면 시사영어를 고르고 싶어요. 제가 가르치는 시사영어 수업에서는 ‘부채’를 중심으로 한 시사거리를 다루고 있어요. 많은 학생들은 부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제대로 배운 적도 없어요. 우리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부채 문제에 대해 다루다 보면 한국이든 그리스든 다른 국가든 모두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저는 이런 부채 문제에 대해 학생들이 대비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어요. 학생들이 부채를 갖고 있으면 그들이 원하는 일을 하기가 훨씬 어려워지죠. 이런 이유에서 지금의 수업 방식을 진행하게 되었어요.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면 학생들이 더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감탄할만한 학생들을 많이 만나왔어요. 그러나 꼭 한 학생을 고르자면 6년 전쯤 가르쳤던 학생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는 그의 나이에 비해 굉장히 성숙했어요. 제가 영어쓰기와 영어발표 모두 가르쳤는데 두 수업에서 모두 좋은 모습을 보여줬죠. 그가 군대를 가게 되어서 휴가 나오면 인사해달라고 얘기했죠. 나중에 그가 해군 군복을 입고 찾아왔어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는데 그의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놀랐어요. 그는 천안함 침몰 사건 당시 천안함 위에 있었던 해군들 중 한 명이었고, 당시 상황을 전해 듣게 되었어요. 제가 가르친 학생 중에 그 현장에 있던 사람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으니까요. 솔직하게 제 학생들 중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그 학생밖에 없을 거예요. 정말 똑똑하고 생각이 올바른 학생이거든요.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은 바로 그 학생이에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교환학생으로 왔는데 한국의 첫 이미지는 정말 별로였어요. 기숙사 통금 시간이 10시였는데 11시 30분에 기숙사 앞에 도착했죠. 그런데 경비원이 들여보내주지 않아서 문이 열릴 때까지 기숙사 앞에서 기다려야 했어요. 2월이었는데 한국에서의 첫날밤을 밖에서 보냈던 거죠. 한국이나 한국인의 이미지가 처음에는 별로였지만 지내다 보니 이곳이 좋아졌고 계속 살게 되었어요. 제가 1990년대 초반에 한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이 영어를 못했어요. 그래서 한글은 제가 한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어요. 그것 외에 한국에서 어려움을 느낀 적은 없어요. 이제 한국에서 산 지는 25년 되었죠. 대부분 제가 가르친 학생들이 숨쉰 기간보다 길 거에요. (웃음) 저의 삶은 그저 학생들의 부모님들과 같아요. 비록 다른 국적을 갖고 있지만요. 전 오히려 이제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게 한국생활보다 더 힘들 것 같아요. 한국이라는 곳은 저에겐 더 이상 특별한 곳이 아니죠. 저는 제 주위에 외국인이 많으면 어색해요. 제가 평범하게 느끼려면 한국인들이 꼭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교수가 가져야 할 것은 수업을 통제하는 능력과 자신이 가르치는 것에 대한 자신감이라고 생각해요. 요즘은 똑똑한 학생들이 매우 많아서 그 학생들이 교수보다 더 똑똑할 수도 있죠. 학생들이 저도 답을 모르는 질문을 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저는 수업에서만큼은 가장 똑똑한 사람이어야 하니까 답을 무조건 찾아내야해요. 그래서 두 가지가 중요하다고 봐요. 또 인내심도 필요해요. 특히 영어발표 같은 수업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발표하는 방법을 배워본 것이 아니라 잘 못할 수도 있어요. 그들이 처음부터 스티브 잡스와 같은 프레젠테이션을 하기는 어렵죠. 저는 끊임없이 그들이 발전할 때까지 도와줘야 해요. 그래서 인내심이 필요하죠. 학점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저는 공정하게 점수를 주려고 해요. 학생들의 집안이 어떻든 부모님이 누구시든 그들이 받아야 할 점수를 주죠. 제가 쉽지 않은 교수일 수는 있어요. 그렇지만 저는 제가 공정한 교수라고 생각합니다.”